‘이카루스의 서약’이 맺어졌던 그 밤의 비장함은, 차가운 현실의 무게 앞에서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맹세의 열기가 아니라, 자신들이 짊어지기로 한 운명의 서늘한 무게뿐이었다.
폐쇄된 지하철역, 그들의 유일한 아지트인 ‘오디세이’는 거대한 작전 상황실로 변해 있었다. 중앙의 뻥 뚫린 플랫폼 공간에는, 김서연이 폐기물로 조합해 낸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포세이돈 프로젝트’의 거대한 설계도를 띄워놓고 있었다. 푸른빛의 입체 도면은 낡은 콘크리트 벽 위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그 압도적인 규모와 완벽에 가까운 구조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의 청사진이 아니라, 팀원들의 결의를 시험하는 절망의 지도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네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거대한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언제나처럼 익명 채널의 채팅창이었다.
[ Zero ]: 그래서. '오퍼레이션 이카루스'라.
[ Zero ]: 분명히 하지. 이건 작전이 아니야. 유서에 가깝다고.
제로의 텍스트는 특유의 냉소로 번뜩이고 있었다.
[ Zero ]: 내가 '오라클'의 방화벽을 분석해 봤어. 이건 '벽'이 아니야. 살아있는 신(神)이야. 내가 공격 패턴을 입력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의도를 예측하고 3단계 앞의 방어벽을 새로 구축해. 이건 해킹이 아니야. 체스 챔피언이 3살짜리 꼬마랑 두는 체스 같은 거지. 내가 꼬마고. 기분 더럽게도.
그의 냉정한 평가는 아지트의 온도를 몇 도 더 끌어내렸다. 그가 인정하는 패배는,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물리적인 상황은 더 나빠.”
이강혁이 홀로그램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지난 며칠간 ‘포세이돈’의 외곽을 정찰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전문가로서 느끼는 깊은 좌절감이 서려 있었다.
“이건 항만이 아니야. 요새, 아니, 거대한 살육 기계야. 외벽은 3미터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고, 50미터마다 음향 센서와 레이더가 박혀있어. 상공은 24시간 무인 드론이 편대 비행을 하고, 주요 진입로에는 K-6 중기관총을 장착한 자동화 포탑이 깔려있어. 제로가 말한 '신'이, 진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야.”
그는 홀로그램의 특정 구역, SMR(소형 모듈 원자로)이 위치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거. 자체 동력원. 국가 전력망이 끊겨도 이 괴물은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어. 우리가 저 안으로 들어간다? 500미터 전방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거야. 이건 돌파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야.”
최진아는 두 남자의 암울한 브리핑을 들으며, 낡은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정보도 마찬가지야. 저 안에 몇 명의 ‘새니테이션’ 팀이 상주하는지, 교대 주기는 어떻게 되는지, 우린 아무것도 몰라. 저들의 통신은 우리가 아는 모든 암호화 체계를 벗어나 있어. 완벽하게 눈과 귀가 먼 상태로 전쟁터에 뛰어들 수는 없어.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야.”
방패는 뚫을 수 없고, 창은 닿지 않으며, 눈은 멀었다. '이카루스의 서약'은, 날개조차 만들지 못한 채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모두의 시선이 조용히 김서연에게로 향했다. 그녀만이 이 절망적인 교착 상태를 깰 수 있었다.
김서연은 지난 며칠간, ‘포세이돈’의 설계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박선우의 외장 하드에서 나온,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지루해 보이는 데이터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아에타스 프로젝트 - 수도권 기간망 관리 시스템(Aetās Project - Seoul Metropolitan Grid Management System)’.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시스템 로그와 백업 파일들이었다.
그녀는 다른 팀원들의 절망적인 보고를 듣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기억 속에서 어떤 익숙한 패턴을, 기시감을 쫓고 있었다.
‘오라클’은 완벽하다. 하지만 ‘오라클’은 혼자가 아니다.
신(神)이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는다. 신은 사제(司祭)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그렇다면 ‘오라클’의 사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틀렸어.”
김서연의 낮은 목소리가 아지트의 침묵을 갈랐다. 그녀는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데이터를 교체했다. 거대했던 ‘포세이돈’의 조감도가 사라지고, 서울 상암동의 평범해 보이는 하이테크 빌딩의 3D 도면이 떠올랐다.
“우리는 태양을 공격하려 했어. 하지만 이카루스도 처음부터 태양을 향해 날지 않았어. 그는 먼저 하늘로 올라가야 했지. 우리에게도 발판이 필요해.”
최진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상암동 디지털 미디어 시티? 저긴 그냥 평범한 데이터 센터잖아.”
“겉보기엔 그렇지.”
김서연이 도면을 확대했다. 지하 7층,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된 서버실의 구조가 드러났다.
“여기의 공식 명칭은 ‘G-14 데이터 백업 센터’야. 하지만 ‘아키텍츠’ 내부 코드명은 달라. ‘하데스 볼트(Hades Vault)’.”
“하데스… 지하 세계의 신.” 이강혁이 읊조렸다.
“맞아.” 김서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눈에 보이는 ‘포세이돈’이 신전이라면, 여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하데스의 영역이야. ‘오라클’은 ‘포세이돈’이라는 신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각기관, 즉 눈과 귀의 통제 권한을 이곳에 분산시켰어.”
그녀는 ‘하데스 볼트’의 역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전역에 설치된 ‘아키텍츠’의 모든 물리적 보안 시스템. 수만 대의 CCTV, 음향 센서, 드론, 그리고… ‘새니테이션’ 팀의 실시간 통신까지. 그 모든 정보가 일단 이곳, ‘하데스 볼트’로 모여. 여기서 1차로 데이터를 처리하고, 정제된 정보만을 ‘오라클’에게 보고하는 거야. 여긴 ‘포세이돈’의 방화벽이자, ‘오라클’의 신경 말단이야.”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절망이 걷히고, 날카로운 집중력이 그 자리를 메웠다.
김서연은 두 가지 핵심 목표를 제시했다.
“우리가 이곳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
그녀는 이강혁과 최진아를 바라보았다.
“‘새니테이션’ 팀. 우리가 유령처럼 쫓기던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보는데,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야. 이 서버에는 그들의 실시간 통신을 감청할 수 있는 **마스터 암호화 키(Master Encryption Key)**가 저장돼 있어. 이걸 손에 넣으면, 우린 비로소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돼. 유령 사냥꾼이 되는 거지.”
이강혁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림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둘째.”
김서연의 시선이 제로의 채팅창으로 향했다.
“‘오라클’은 신이라고 했지. 신을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신을 속일 수는 있어. 이 서버에는 ‘오라클’이 자신의 하위 시스템(드론, 포탑 등)을 업데이트하고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하위 프로토콜 접속 권한(Subordinate Protocol Access)’**이 있어. 이건 ‘오라클’의 서명이 담긴, 일종의 ‘신분증’이야. 만약 우리가 이걸 손에 넣으면…”
제로의 채팅창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 Zero ]: …We can impersonate God. (…우리가 신을 사칭할 수 있게 되지.)
[ Zero ]: '포세이돈'의 방어 시스템 앞에서, 우리가 '오라클'인 척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거야. '문 열어라', '작동을 멈춰라' 같은.
[ Zero ]: I like it. I like it a lot.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목표는 정해졌다. 태양을 향해 날기 전, 그들은 먼저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의 목을 베어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였다.
제로의 다음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 Zero ]: So, how do we waltz into the second-most secure building in Asia? (그래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안전한 그 빌딩에 어떻게 춤추며 입장하시겠다?)
“‘하데스 볼트’는 ‘포세이돈’보다 규모는 작지만, 방어 논리는 동일해.”
김서연이 ‘하데스 볼트’의 3D 도면을 띄우고 분석을 시작했다. 그녀의 뇌가 다시 한번, 잊힌 기억 속의 익숙한 감각으로 빠져들었다. 이 설계도, 너무나 익숙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오만함, 효율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냉혹함. 이것은 ‘그’의 방식이었다. ‘권석열’의 방식.
“SMR 독립 전원. EMP 차폐벽. 외부와 완벽히 격리된 폐쇄망. 그리고 ‘오라클’의 직접 감시. 정면 공격은 불가능해.”
그녀가 홀로그램을 회전시키자, 건물의 지하 단면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실수를 했어. ‘포세이돈’과 똑같은 실수를. 완벽한 디지털과 물리적 방어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원초적인 것을 간과했지. 물리학.”
그녀의 손가락이 지하 7층 서버실 아래를 흐르는 거대한 배관을 가리켰다.
“SMR의 폐쇄형 냉각 시스템. 하지만 이건 비상용 열 교환기야. 시스템 과부하 시, 막대한 열을 식히기 위해 도시의 메인 하수도 트렁크 라인과 연결되어 있어. ‘아키텍츠’의 첨단 기술이, 서울시의 가장 낡고 더러운 기반 시설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지.”
이강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수구라. 고전적이지만, 언제나 확실한 방법이지.”
“하지만 문제는….”
김서연이 말을 이었다.
“이 통로는 평소에는 닫혀있어. 우리가 접근해도 티타늄 합금으로 된 수문이 막고 있을 거야. 그리고 제로의 말이 맞아. 우리가 그 수문을 건드리는 순간, 압력 센서와 수온계가 즉각 ‘오라클’에 비상 신호를 보낼 거야.”
“그렇다면,”
최진아가 끼어들었다.
“신호가 울려도 ‘오라클’이 무시할 수밖에 없는, 더 큰 소동을 만들면 어떨까?”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불가능해 보였던 작전의 윤곽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제로.”
김서연이 채팅창을 불렀다.
“당신이 필요해. ‘오라클’의 시선을 하데스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사상 최대의 연막이.”
[ Zero ]: '하데스 볼트'는 상암동에 있어. '오라클'의 서울 내 최우선 순위 자산은 강남의 금융 허브와 시청의 교통 관제 시스템. 두 곳을 동시에 타격한다면?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정도의 대혼란이라면, ‘오라클’은 자신의 모든 연산력을 그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겠지. 하수구의 압력 센서 따위는 그 혼란 속의 사소한 '글리치'로 묻힐 거야.
“디지털 연막만으로는 부족해.”
최진아가 반박했다.
“현장의 물리적 보안 병력은 여전히 남아있을 거야. 그들의 눈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해.”
그녀는 ‘하데스 볼트’ 주변의 지도를 살폈다.
“볼트 바로 옆, 월드컵 경기장. 사흘 뒤에 대형 K-Pop 콘서트가 있어. 지금 한창 무대 설치 중이겠군. 완벽한 장소야. 내가 가진 모든 언론 라인을 동원해서, 콘서트 무대 설치 현장에 ‘화학물질 테러 위협’이 있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흘릴 거야. 경찰과 소방, 그리고 ‘하데스 볼트’의 보안팀까지. 모든 인력이 경기장으로 쏠리게 되겠지.”
이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동시 교란. 그 혼란을 틈타, 내가 하수구를 통해 수문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걸로 문을 열지.”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소형 플라스마 절단기를 꺼내 보였다.
“수문이 열리면, 내가 서버실로 직행한다. 온라인으로 김서연이 지시하고 나는 수행한다. 심플해.”
“아니.”
김서연이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 혼자서는 안 돼. 서버실 내부는 당신이 아는 전투와는 달라. 모든 것이 ‘오라클’의 통제 아래 있어. 문을 여는 순간, 내부 방어 시스템이 활성화될 거야. 가스 살포, 고압 전류… 그 모든 함정을 우회하고 무력화시키는 건 내 역할이야. 같이 들어가야 해.”
이강혁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키텍츠의 추격조로부터 탈출할 때 보였던 인간을 초월한 그녀의 ‘엔지니어링 센스’. 그는 그녀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모든 계획이 세워졌다. 각자의 역할이 정해졌다.
김서연은 이 거대한 작전 계획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었다. 그녀는 홀로그램에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을 그렸다. 사자의 몸과 독수리의 머리, 그리고 날개.
“작전명, ‘오퍼레이션 그리핀(Operation Griffin)’.”
최진아가 그 의미를 물었다.
“그리핀은 고대부터 가장 귀한 보물, 즉 ‘황금’을 지키는 수호수였어.”
김서연의 시선이 ‘하데스 볼트’의 설계도를 향했다.
“그리고 사자의 몸으로 땅을, 독수리의 날개로 하늘을 지배하는, 완벽한 하이브리드(Hybrid) 생명체지. 우리의 싸움처럼. 이강혁의 물리력과 제로의 디지털 능력. 그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만 저 보물을 훔칠 수 있어.”
아지트에는 다시 결연한 침묵이 흘렀다. ‘이카루스의 서약’은 더 이상 추상적인 맹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구체적인 목표와 날짜, 그리고 치밀한 설계도를 가진, 냉혹한 작전이 되었다.
김서연은 ‘하데스 볼트’의 도면을 응시했다. 이 익숙한 설계의 악몽.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신이 이 끔찍한 미로를 설계한 자들과 한때 동료였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사적인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사냥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