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신들의 전쟁

by 닥터 F

‘판도라의 상자’가 토해낸 진실의 파편들이 아지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먼지처럼 떠다녔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수백 명의 비명, 차갑게 계산된 악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는 거대한 오만이 데이터의 형태로 응축된, 만질 수 있는 절망이었다.


아지트를 지배하던 것은 충격과 분노를 넘어선,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마치 거대한 폭발 직후,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이명만이 고막을 채우는 것과 같은 상태. 각자의 마음속에서, 진실의 무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강혁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부수고 소리치고 싶은 원초적인 충동을 억누르며,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한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분노는 이제 죽은 동료들을 향한 뜨거운 복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처럼, 차갑고 공허한 증오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은… 사고 현장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저… 공사를 편하게 하려고 치워버린 돌멩이 같은 거였나.”


그의 자조적인 물음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부수적 피해’라는 군사 용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영혼을 향한 모독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훈련과 신념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해 바쳤던 시간들. 하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국민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소모품처럼 버려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왔던 것인가. 그의 총과 주먹은, 이 거대한 시스템의 기만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다.


최진아는 벤치에 주저앉아,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기자로서의 날카로운 분노가 아닌, 깊은 환멸과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수십 년간 부패와 음모를 파헤치며, 그녀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이익을 위한 범죄가 아니었다. 이것은 신념을 위한 학살이었다. ‘아키텍츠’는 자신들을 인류를 구원할 외과 의사라 믿고, 수백 명의 생명을 ‘괴사한 조직’을 도려내는 과정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 오만함,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순수한 악의. 그것은 돈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휘둘러온 ‘진실’이라는 펜은, 이 신념의 갑옷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그녀는 문득, 자신이 거대한 신전의 벽에 계란을 던지고 있는 광대처럼 느껴졌다.


아지트의 가장 깊은 곳, 수십 개의 모니터가 뿜어내는 푸른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김서연은, 마치 디지털 세계의 여신상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내면은 그 누구보다 격렬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프로젝트 루멘’.


그 단어가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인 동시에 유일한 단서였다. ‘포세이돈’의 설계도를 해독하며 느꼈던 기묘한 기시감의 정체. 그녀는 이 시스템의 논리를, 그 철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알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직접 설계에 참여했던 것처럼.


‘내가… 대체 누구이기에…’


그녀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을 억누르며, 기계처럼 차갑게, 감정을 배제하고 눈앞의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적을 이기는 것이 먼저였다. 자신의 정체를 찾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어쩌면 그 두 가지는 같은 길 위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포세이돈 프로젝트’의 설계도가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아지트 중앙에 펼쳐졌다.


“이게…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야.”


김서연의 목소리에 아지트의 모두가 홀로그램을 주목했다. 그곳에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동북아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네트워크 망이 붉은 핏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포세이돈’은 단순한 항만이 아니야. 스스로 생각하고, 숨 쉬고, 진화하는 유기적인 요새야.”


김서연은 홀로그램의 특정 부분을 확대했다. 무인 크레인들이 거대한 곤충처럼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옮기고, 무장 드론들이 벌 떼처럼 항구 상공을 순찰하고 있었다. 해상에는 잠수 기능까지 갖춘 무인 경비정들이 빈틈없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에 구상했던 악몽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진 듯한 불쾌한 기시감.


“물리적 보안 시스템은 군사 기지 수준을 넘어. 모든 것은 중앙 통제 AI, ‘오라클’의 통제 아래 유기적으로 움직여. 외부에서의 해킹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제로’의 실력으로도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일 뿐이야.”


그녀는 홀로그램을 회전시켜, 항만 지하 깊숙한 곳을 비췄다. 그곳에는 거대한 심장처럼 붉은빛을 내뿜는 돔 형태의 구조물이 있었다.


“이게 ‘오라클’의 메인 서버이자, 이 모든 시스템의 심장이야. 문제는 전력 공급. 이런 괴물을 움직이려면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삼킬 만큼의 전력이 필요해. 그래서 그들은 이걸 설치했지.”


돔 옆으로 작은 원자로의 설계도가 나타났다.


“SMR. 소형 모듈 원자로야. 국가 전력망과는 완전히 독립된, 자신들만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 국가가 ‘킬 스위치’를 발동해도, 이 요새는 멈추지 않아.”


절망적인 설명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이것은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었다. 국가조차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독립된 왕국이자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이강혁이 간신히 쥐어짜듯 물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군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있어.”


김서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대답하며 자신의 본능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왜 나는 이 괴물의 약점을 알고 있는 거지?


“모든 완벽한 시스템에는 반드시 균열이 존재해.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믿는 오만함이 바로 그 시스템의 가장 큰 취약점이니까. ‘오라클’은 완벽에 가까운 논리 회로를 가졌지만, 그 논리를 만든 기반은 불완전한 인간의 데이터야. 그리고… 그 구조에는 내가 아는 패턴이 있어.”


그녀는 다시 홀로그램을 조작했다. 거대한 요새의 설계도 위에, 그녀는 가느다란 선 하나를 그었다. SMR의 냉각 시스템에서부터 시작되어, 수십 킬로미터의 지하 터널을 지나 ‘오라클’의 서버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균열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그 경로를 그려냈다.


“0.017%의 열효율 오차. 냉각 시스템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비상 배출 프로토콜이야. ‘아키텍츠’는 이걸 단순한 시스템의 결함으로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뒷문이야.”


김서연의 설명에 희미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작전을 설명해 나갔다. 제로가 도시 전체의 통신망을 교란하여 연막을 치고, 최진아가 가짜 뉴스로 물리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사이, 이강혁과 자신이 직접 그 뒷문을 통해 심장부로 침투하여 ‘오라클’을 물리적으로 파괴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이건 복수가 아니야.”


김서연은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누군가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전쟁이야.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그들이 만들어낼 ‘영원한 안정의 시대’는 인류에게 영원한 암흑기가 될 거야. 인간의 자유의지가 거세된, 완벽하게 통제되는 가축의 우리. 나는… 나는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세상은 용납할 수 없어.”


그녀의 선언에, 팀의 목표는 마침내 하나로 모였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신이 되려는 오만한 인간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기계 신에 맞서,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일지라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기 위한,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최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구겨진 담뱃갑에서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신들의 전쟁이라… 재미있네. 내 기자 인생 마지막 특종으로는 아주 근사한 제목이야.”


이강혁은 말없이 자신의 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기름 냄새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복수심이 아닌, 인류의 운명을 건 싸움에 나서는 전사의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김서연은 이 무모하고도 위대한 작전에 이름을 붙였다.


“작전명, ‘오퍼레이션 이카루스’.”


‘아키텍츠’라는 거대한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무모하지만 필사적인 반격. 설령 그 끝이 날개가 녹아내리는 추락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날아오르기로 결심했다.


작전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김서연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퍼레이션 이카루스’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과거 자신이 겪었던 사고와 탈출 과정을 데이터로 입력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싱크홀에서의 생존, ‘아키텍츠’의 감시망을 뚫고 병원을 탈출했던 과정.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 생존 확률: 0.0013% ]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 그녀는 자신의 능력과 판단이 뛰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이 숫자는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가 살아남도록 판을 짜준 것처럼. 시스템의 감시망에 절묘한 타이밍에 오류가 발생하고, 그녀가 필요했던 도구들이 우연처럼 주변에 놓여 있었던 기억들.


그녀는 사고 당일, 서울에 있었던 대규모 정전 사태의 로그를 다시 분석했다. 그 정교한 공격 패턴은 ‘리바이어던’의 킬러 AI가 남기는 특유의 시그니처와 유사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왜 자신을? 모든 것이 안갯속이었다.


머릿속에서 논리의 회로가 엉키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 그녀의 생존 자체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거대한 ‘버그’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키텍츠’라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 속에 숨겨진 이 미스터리 또한 풀어야만 했다. 자신의 존재를 뒤흔드는 판도라의 질문. 그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이 무모한 날갯짓은 시작도 전에 추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서연은 복잡한 상념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홀로그램 설계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부산항을 향해 날아가는, 한 마리 위태로운 나비의 항적이 그려져 있었다. 이카루스의 날갯짓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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