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하는, 신경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알림음과 함께 제로의 마지막 메시지가 채팅창에 떠올랐다.
[ Zero ]: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제군들. 이제 지옥을 볼 시간이야.
그 말을 증명하듯, 중앙 모니터를 가득 채웠던 기괴하고 아름다운 디지털 유기체는 한순간에 형체를 잃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잘 정돈된 폴더와 파일의 목록이 아니었다. 마치 댐이 무너지듯, 수십 년간 겹겹이 쌓여 압축되었던 데이터의 원석들이 아무런 질서 없이 팀의 눈앞에 토해져 나온 것이다. 시스템 로그, 재무 보고서, 암호화된 이메일, 설계도의 파편, 음성 파일, 영상 기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알고리즘 코드까지. 수백만, 수천만 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거울처럼, 진실의 파편들이 혼돈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모니터를 가득 메웠다.
“젠장… 이게 다 뭐야…”
이강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그저 의미 없는 노이즈의 폭풍으로 보일 뿐이었다. 전쟁터에서 적의 암호 전문을 노획했지만, 해독표가 없어 무용지물이 된 것과 같은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이 디지털의 심연 속에서, 그의 총과 주먹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Zero ]: 그냥 백업 파일이 아니야. 이건… ‘아키텍츠’의 중추 신경계에서 떼어낸 뇌 조직 샘플 같아. 모든 게 뒤죽박죽 얽혀있어. 원하는 정보를 찾으려면, 이 쓰레기 산 전체를 파헤쳐야 할 거야. 행운을 빌지, 난 잠시 눈 좀 붙여야겠어. 며칠 밤을 샜더니 손가락이 파업 직전이거든.
그 메시지를 끝으로, 제로의 채널은 오프라인 상태로 전환되었다. 유령처럼 나타나 문을 열고, 다시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아지트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전의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침묵과는 그 결이 달랐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혼돈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함정이라면 이토록 복잡하고 방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김서연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혼돈으로 보이는 데이터의 폭풍이,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언어를 다시 만난 듯한, 혼란스러운 기시감. 기억의 서랍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손끝과 뇌세포는 이 데이터의 구조와 흐름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왜지? 나는 누구인데, 이 기계의 언어가 이렇게까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혼란을 떨쳐내고, 자신의 정체를 찾기 위한 유일한 단서인 이 데이터의 바다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최진아였다. 그녀는 기계의 복잡함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낡은 노트북을 들고 중앙 컴퓨터 중 하나에 연결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 위를 오갔다. 그녀가 찾는 것은 단 하나, 모든 범죄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남는 흔적, 바로 ‘돈’이었다.
“모든 진실은 돈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데이터의 폭풍 속에서 재무 관련 파일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태성 건설’의 이면 계약서, 페이퍼 컴퍼니들의 자금 거래 내역, 로비 자금으로 추정되는 출처 불명의 계좌들. 그녀는 수십 년간 갈고닦은 기자로서의 본능으로, 이 거대한 자금의 강줄기에서 가장 흙탕물이 심하게 이는 지류들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지하철 붕괴 사고와 관련된 비자금 조성과 책임자들의 개인적인 착복으로 보였다. 이미 예상했던 수준의,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부패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최진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은 알고 있었다. 진짜 악은 언제나 가장 평범하고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눈에 이질적인 흐름 하나가 포착된 것은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하철 붕괴 사고의 복구 및 피해보상금 명목으로 책정된 천문학적인 정부 예산. 그중 상당액이 ‘태성 건설’과 그 하청업체들로 흘러 들어간 뒤,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거쳐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돈의 최종 목적지가 개인의 비밀 계좌나 해외 조세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돈은 하나의 거대한 저수지를 향해 꾸준히 흘러들고 있었다. 코드네임 **‘포세이돈(Poseidon)’**이라고 명명된 법인의 계좌였다.
“포세이돈…?”
최진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포세이돈’의 실체를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법인의 등기부등본 앞에서 그녀는 실소를 터뜨렸다. 법인의 주소지는 부산항의 어느 낡은 창고였고, 사업 목적은 ‘항만 물류 시스템 컨설팅 및 소프트웨어 개발’이었다. 겉보기에는 조금 규모가 큰 스타트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흘러 들어간 돈은, 어지간한 중견 기업의 1년 예산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모였다. 서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피 묻은 돈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부산의 이름 모를 항만 창고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관련 데이터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태성 건설’이 서울 지하철 공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산 신항만 부지 심층 지질 조사 및 전력망 설계 변경에 관한 비공개 용역 보고서’**를 비밀리에 수행한 기록이었다. 보고서의 최종 승인자란에는 ‘아키텍츠’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두 개의 점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서울의 비극과 부산의 항구.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던 두 장소는, ‘아키텍츠’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끈적하고 추악한 핏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같은 시각, 김서연은 데이터의 바다 가장 깊은 곳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수십 개의 창이 떠 있었다. 각 창에는 설계도의 파편, 반도체 회로도, 시스템 운영체제의 커널 코드 같은 것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떠다녔다.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뇌를 데이터와 직접 동기화했다. 그녀의 눈에 더 이상 문자와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에너지의 흐름, 논리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미세한 균열들이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오랫동안 잊었던 춤을 다시 추는 무용수처럼 키보드 위를 흘러 다녔다. 흩어진 데이터의 파편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자석처럼 이끌려 제자리를 찾아갔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과거의 누군가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기분. 이 설계도의 논리, 이 시스템의 철학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마치… 내가 직접 만든 것처럼. 섬뜩한 생각에 그녀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포세이돈’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기술 관련 데이터들을 모았다. 최진아가 돈의 흐름을 쫓았다면, 그녀는 기술의 흐름, 즉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쫓았다. 그리고 몇 시간에 걸친 지난한 재구성 끝에, 마침내 ‘포세이돈 프로젝트 제안서’의 일부를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화면에 떠오른 문장들은 건조하고 기술적인 용어들로 가득했지만, 그 내용은 SF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끔찍했다. ‘포세이돈 프로젝트’는 단순한 항만 자동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인공지능(AI) 기반 수요 예측을 통한 하역 프로세스 완전 자동화. 선박 입항부터 컨테이너 이동, 통관, 출항까지 인간의 개입을 0%로 최소화…]
[…동북아 전체의 물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 분석하여 경쟁국의 경제 동향 및 안보 위협 요소를 사전에 예측. 물류 흐름의 미세 조정을 통해 타겟 국가의 핵심 산업에 의도적인 공급망 차질을 유발하는 ‘경제적 압박(Economic Choke)’ 시나리오 포함…]
[…이 모든 프로세스를 총괄하는 중앙 통제 AI, 코드네임 ‘오라클(Oracle)’. ‘오라클’의 판단은 최종적이며, 시스템의 그 어떤 요소도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김서연은 차가운 피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항만이 아니었다. 물류를 인질로 삼아 동북아 전체의 경제와 안보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무기’**의 설계도였다. 그들은 부산항에 신전을 짓고, ‘오라클’이라는 이름의 신을 앉히려 하고 있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계 신에게 세계 경제의 대동맥을 맡기려는, 광기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설계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심장을 멈추게 할 단어를 발견했다. ‘오라클’의 하위 시스템 중 하나가 **‘프로젝트 루멘(Project Lumen)’**의 기술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는 문장이었다.
‘루멘’.
그 단어를 보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 백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격통이 찾아왔다. 텅 비어 있던 기억의 서랍이 미친 듯이 덜컹거리며,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쏟아냈다. 하얀 가운, 복잡한 뇌파형 그래프,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차가운 수술 도구. 그리고… ‘권석열’이라 불리던 남자의 차가운 눈빛.
“으윽…!”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고통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루멘’이 무엇인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한때 자신의 전부였으며, 가장 소중한 것이었음을 영혼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아지트의 출입구를 지키며 두 여자의 작업을 지켜보던 이강혁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총을 쏘고, 적을 제압하고, 위기를 돌파하는 데는 전문가였지만, 눈앞의 디지털 전쟁터에서는 그저 무능한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는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지만, 지금 그는 그 복수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초조하게 아지트 안을 서성이다, 최진아가 출력해서 바닥에 던져놓은 서류 뭉치들을 발견했다. ‘태성 건설’의 자금 세탁 경로, ‘아키텍츠’가 사들인 유령 회사들의 목록, 그리고 그 회사들이 지하철 붕괴 사고 직후 헐값에 사들인 사고 현장 주변의 부지 목록이었다.
“최 기자, 이 땅들은 왜 사들인 거지? 사고 때문에 땅값도 폭락했을 텐데.”
이강혁의 질문에, 데이터에 몰두해 있던 최진아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나도 그게 이상했어. 그런데 김서연 씨가 복원한 자료랑 맞춰보니 그림이 나오더군.”
그녀는 지도를 띄워, ‘아키텍츠’가 사들인 부지들을 붉은 점으로 표시했다. 점들은 기묘한 형태로 이어져, 마치 서울의 지리에 거대한 상처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부지들은 ‘포세이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하지만 ‘아키텍츠’가 추진 중인 또 다른 프로젝트, **‘국가 기간 통신망 및 전력망 지하 광케이블 고속도로’**의 핵심 경로야. 지하철 붕괴 사고는, 그 프로젝트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노후화된 주거 지역과 복잡한 상권을 ‘합법적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을 제공해 준 거지.”
그 순간, 이강혁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그는 전술가의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나 사고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었다.
1단계: 목표 설정 (Objective): 부산에 ‘포세이돈’이라는 신전을 짓고, 서울에 새로운 ‘혈관’을 뚫는다.
2단계: 사전 정지 작업 (Site Preparation): 목표 달성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고, 물리적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3단계: 작전 실행 (Execution):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인명 사고를 유발한다.
이강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론을 내뱉었다.
“이건… 정지 작업이었어. 사고 현장의 희생자들은… 그들의 거대한 계획을 위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였던 거야.”
그의 말에 아지트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최진아는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김서연조차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세 사람이 중앙 모니터 앞에 모였다. 각자가 발견한 진실의 조각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최진아가 발견한 ‘돈의 길’. 서울의 비극에서 시작되어 부산의 신전으로 향하는 추악한 자금의 흐름.
이강혁이 간파한 ‘작전의 본질’.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그저 목표 달성을 위한 장애물처럼 취급한, 비인간적인 전략.
그리고 김서연이 마주한 ‘잃어버린 악몽’.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포세이돈’과 ‘오라클’이라는, 인류를 통제하려는 기계 신의 실체.
모든 조각이 맞춰졌을 때, 그곳에 나타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악의 그림이었다.
지하철 붕괴 사고는 사고가 아니었다. 비리 은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신전을 짓기 위해, 수백 명의 산 사람을 제단에 바친 **인신공양(人身供養)**이었다. 희생자들의 피와 공포, 그리고 국민들의 세금이 ‘포세이돈’이라는 괴물을 잉태시킨 자궁이었던 것이다.
“제물…”
최진아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분노가 아닌,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깊은 환멸이 서려 있었다.
이강혁은 두 주먹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그의 분노는 이제 죽은 동료들을 향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넘어섰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벌레처럼 짓밟은 ‘아키텍츠’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존재를 건 증오로 변해 있었다.
김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의 근원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음모가 아니었다.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과,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것일지도 모르는 끔찍한 과오에 대한 이야기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악과 절망을 응축시킨, 끔찍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상자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분노보다 뜨겁고, 절망보다 단단한, 자신의 과거를 되찾기 위한 반격의 불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