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부. 네 번째 조각, 시스템을 비웃는 유령

by 닥터 F

박선우가 넘긴 외장 하드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 안에는 '아키텍츠'의 죄악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상자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젠장, 열리질 않아."


최진아가 며칠 밤낮으로 매달렸지만, 데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일 하나하나에 다중 양자 암호화가 걸려 있었고, 잘못된 접근이 세 번 누적되자 하드 드라이브는 스스로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는 자폭 시퀀스에 돌입했다. 김서연이 간신히 전원을 차단해 최악의 상황은 막았지만,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이건 단순한 암호가 아닙니다."


김서연은 차갑게 식은 단말기 위로 허공에 손짓하며 설명했다. 그녀의 눈에는 데이터의 흐름이 보였다.


"파일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서로를 감시하고 있어요. 하나의 파일이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모든 파일이 동시에 정보를 변형시키고 위치를 바꿉니다. 이건 자물쇠가 아니라, 스스로 형태를 바꾸는 미로입니다."


이강혁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럼,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는 건가?"


"아니요."


김서연의 눈이 빛났다.


"이런 미로를 통과하려면, 벽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유령이 필요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제로(Zero)'**를 찾아야 합니다."


최진아의 눈이 커졌다. '제로'. 그는 전설이었다. 국가는 물론, 거대 기업의 서버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신이 다녀간 흔적으로 숫자 '0'만을 남기는 익명의 해커.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그를 어떻게 찾지? 그는 유령이야."


최진아의 질문에 김서연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유령은 잡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나타나도록 덫을 놓아야죠."


김서연의 계획은 대담했다. '제로'는 정의나 명분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에만 반응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를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김서연은 '아키텍츠'가 운영하는 위장 학술 포럼의 가장 취약한 서버를 찾아냈다. 그녀는 서버를 공격하는 대신, 그곳에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프랙탈 기하학 이미지 파일 하나를 업로드했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현존하는 어떤 기술로도 풀 수 없는 암호화된 수학적 질문 그 자체였다. '아키텍츠'라는 완벽주의자들의 시스템에 남겨진 오점. '제로'와 같은 천재에게는 참을 수 없는 지적 유혹이었다.


팀의 임시 아지트인 폐쇄된 지하철역에는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며칠이 지나도 '제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초조해하는 이강혁과 최진아와는 달리, 김서연은 묵묵히 다음 설계를 준비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팀이 사용하는 익명의 채널에 단 한 단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Boring. ]


'제로'였다. 그는 김서연의 암호를 풀어냈고, 그 끝에 숨겨진 채널로 들어온 것이다.


[ 제로: ] 이런 고리타분한 장난 말고, 더 재미있는 건 없어?


그의 메시지는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최진아가 설득에 나섰지만, 그는 코웃음만 쳤다.


[ 제로: ] 정의? 복수? 그런 건 배부른 놈들이나 하는 소리. 난 그냥 놀고 싶을 뿐이야. 최고의 놀이터에서.


협상이 결렬될 찰나, 김서연이 직접 키보드를 잡았다. 그녀는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그가 원하는 것을 던져주었다.


[ 김서연: ] 먹잇감을 주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로.


그녀는 박선우에게서 받은 외장 하드의 데이터 구조 일부를 캡처해서 보냈다. 스스로를 방어하고 변형하는, 살아있는 미로의 일부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니터 너머로 '제로'의 흥미가 느껴지는 듯했다.


[ 제로: ] ...흥미롭네. 자물쇠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


[ 김서연: ]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이 동물의 심장은 '아키텍츠'가 동북아 물류를 장악하기 위해 만든 최첨단 자동화 항만, '포세이돈 프로젝트'의 서버에 있어. 어때, 이 사냥. 해볼 만해?


'포세이돈 프로젝트'. '제로'의 타이핑이 순간 멈췄다. 그 이름은 해커들 사이에서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김서연은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 김서연: ] 난 이 동물의 급소를 알고 있어. 시스템의 물리적 냉각 시스템에서 발견한 0.017%의 열효율 오차. 이 작은 균열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줄게. 심장을 쏘는 건 네 몫이야.


완벽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쾌감. 그리고 자신의 해킹 기술과 김서연의 공학적 논리가 결합될 때의 시너지. 그것은 '제로'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 제로: ] 좋아. 거래하지. 하지만 난 당신들 '동료'가 아니야. 최종 레이드에 참여하는 '용병'이지. 이번 사냥이 재미없으면, 언제든 떠날 거야.


[ 김서연: ] 좋아.


[ 제로: ] 조건이 하나 더 있어. 작전이 성공하면, '아키텍츠'의 메인 서버에 내 서명을 새겨 넣을 거야. 숫자 '0'을.


그렇게 '팀 오디세이'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동맹이 아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유령과의 위태로운 계약.


김서연은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나 동료애가 아니었다. '아키텍츠'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통과할 유령의 마법. 그것뿐이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0화설정편 - 심연의 조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