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 판도라의 질문

by 닥터 F

차가운 공기가 폐쇄된 지하철역의 거대한 공동(空洞)을 채우고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뜨겁게 달궈진 기계 부품이 내뿜는 오존 냄새가 뒤섞여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곳.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닳고 닳았을 플랫폼의 타일 바닥 위로, 지금은 오직 ‘팀 오디세이’의 심장 소리와 고사양 컴퓨터의 냉각 팬이 돌아가는 소음만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모든 소음의 중심에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었다. 최진아의 끈질긴 뒷조사와 김서연의 날카로운 분석 끝에 확보한, 박선우라는 남자의 외장 하드. 그 안에서 추출된 데이터는 중앙 모니터 위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암호 코드의 나열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다면체로 이루어진 보석이 스스로의 형태를 바꾸며 빛을 삼키고 내뱉는 듯한, 혹은 심해의 미생물이 서로를 감시하며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듯한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디지털 유기체였다.


며칠째, 이 정체불명의 데이터 앞에서 시간은 의미를 잃고 있었다.


최진아는 낡은 벤치에 앉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며칠 전 박선우를 만났던 순간을 복기했다. 그녀의 정보망은 ‘아키텍츠’의 위장 건설사인 ‘태성 건설’ 내부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무너져가는 인물들을 걸러냈고, 김서연은 그중에서 가장 겁이 많고, 가장 죄책감이 크며, 가장 통제하기 쉬운 인물로 박선우를 지목했다. 그는 완벽한 ‘약한 고리’였다.


서울 외곽의 낡은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온 박선우의 얼굴은 살아있는 유령과도 같았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한 그의 눈은 촛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최진아와 이강혁을 집 안으로 들이지도 못한 채, 복도에서 덜덜 떨며 외장 하드를 건넸다. 마치 뜨거운 석탄 덩어리를 넘기듯.


"내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최진아가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그날의 일을 털어놓았다.


“사고 당일이었어. 오후에 갑자기… 서버 전체에 접근 권한 오류가 떴었지. 한 10분 정도? 다들 우왕좌왕하는데, 내 단말기에만 최상위 등급의 보안 문서들이 열리는 거야. 지하철 8호선 최종 안전성 검토 보고서, 자재 수급 내역… 내가 절대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어. 미친놈처럼 뭔가를 클릭했는데, 나도 모르게 파일들이 외장 하드로… 그냥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다운로드가 됐어.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끝나 있었고, 시스템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지.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공교로운 순간이 다시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이건… 이건 악마가 던진 미끼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열리지 않는 파일들이 자신을 옥죄는 저주가 되었다고만 믿고 있었다. 최진아는 그의 말을 반쯤은 흘려들었다. 겁에 질린 남자의 과장된 진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모니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저 데이터를 보고 있자니, 박선우의 광기 어린 증언이 섬뜩한 현실감을 띠기 시작했다.


그 기묘한 정적을 깬 것은, 익명의 보안 채널에 깜빡이는 새로운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제로’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아지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없는, 오직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유령. 그가 팀의 일원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모니터 속 암호 덩어리가 그의 손끝에서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 Zero ]: …진행률 98%. 근데 이거, 좀 이상해.


채팅창에 뜬 문장에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강혁은 소리 없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 Choi Jin-ah ]: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최진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 Zero ]: 암호화 방식 말이야. 이건 그냥 잘 만든 자물쇠가 아니야. 스스로를 방어하고, 공격받으면 구조를 바꾸는 방식이라고. 내가 본 그 어떤 인간의 기술보다 한 세대는 앞서있어. 마치 AI가 자신의 뇌 구조를 본떠서 만든 것 같다고 할까.


잠시 타자를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짧은 간극 후, 제로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 Zero ]: 박선우라는 사람. 프로파일 다시 확인했어. 평범한 중간 관리자 맞아. 이런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도, 이걸 담을 그릇도 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걸 손에 넣고, 무사히 다운로드까지 받을 수 있었지? ‘아키텍츠’의 감시망이 그렇게 허술한 놈들이 아니잖아.


[ Zero ]: 솔직히 말해. 이거 당신들, 정부 쪽이랑 연결된 거 아니야? 국정원? 기무사? 그런 놈들이 뒤에서 판 깔아주고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라면… 박선우에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협력자’가 있었던 거야. 이 판의 진짜 설계자.


제로의 의심은 차가운 비수가 되어 팀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다. 최진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박선우를 만났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 해커 말이 맞아.”


최진아는 낡은 서류 더미 위에서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씁쓸한 연기가 폐부를 채웠다.


“모든 조각이 너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내부고발자, 마침 그를 찾아내는 우리. 그리고 기적처럼 터진 시스템 오류 덕분에 손에 넣었다는 전설급 비밀 데이터까지. 이건… 이건 너무 소설 같은 이야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내 기자로서의 감이 말하고 있어. 이건 너무 완벽한 미끼야. 박선우라는 겁쟁이를 이용해서, 우리를 이 지하 구석에 전부 몰아넣고, 저걸 여는 순간 모두 날려버리려는 함정이라면 어떡할 거지? ‘아키텍츠’는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들이야. 그들에겐 우리 목숨 값보다, 저 데이터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 게 훨씬 더 중요할 테니까.”


최진아의 합리적인 의심에 아지트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강혁은 출입구 쪽으로 몇 걸음 더 옮겨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는 박선우에게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었다. 그저 확보해야 할 ‘자산’이었을 뿐. 하지만 최진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지금 적이 파놓은 함정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었다. 방패로서의 본능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아슬아슬한 침묵이 모두를 짓누를 때, 처음으로 김서연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동안 미동도 없이 데이터의 흐름과 다른 모니터에 띄워놓은 복잡한 로그들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서 인간의 감정이 아닌, 순수한 논리의 언어를 읽어내려는 듯했다.


“두 사람의 의심 모두 합리적이야.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변수가 너무 많아. 박선우라는 인물의 프로파일과 이 데이터의 가치는 정비례하지 않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모니터에 복잡한 데이터 로그와 그래프들을 띄웠다.


“나도 몇 가지 확인해 봤어. 제로의 말이 맞았어. 박선우가 데이터를 다운로드했다고 증언한 시각. 바로 그날, 서울 일부 지역에 약 1분 30초간의 대규모 정전(Blackout) 사태가 있었어. 공식적인 발표는 ‘노후 변전소의 과부하로 인한 사고’였지만, 내가 분석한 전력망 로그는 달라. 외부의 극도로 정교한 충격으로 인한 강제 셧다운이었어. 이건 국가급, 혹은 그 이상의 기술력을 가진 다른 세력의 개입을 의심해 볼 만한 증거야.”


김서연의 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이 판에 뛰어든 것이 자신들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또 다른 절망의 씨앗이었다.


“박선우는 아마도, 거대한 힘들의 충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열린 틈을 통해 이걸 손에 넣었을 거야. 그의 의지나 행운이 아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 그를 ‘통로’로 이용한 거야.”


김서연은 이강혁과 최진아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 존재해. 하지만 이 데이터를 우리에게 넘긴 미지의 존재는, ‘아키텍츠’가 이것을 열어보길 원치 않았어. 그래서 인간의 기술을 초월하는 암호를 걸어둔 거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 저 설계도가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겠지.”


그녀는 다시 중앙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안의 디지털 유기체는 여전히 섬뜩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꿈틀대고 있었다.


“우리가 이 안에서 미래를 바꿀 단서를 찾을 가능성이, 함정에 빠져 죽을 가능성보다 훨씬 더 높아.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해.”


김서연의 선언과 함께, 아지트 전체에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제로의 채팅창으로 향했다.


[ Zero ]: …Bingo.

[ Zero ]: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제군들. 이제 지옥을 볼 시간이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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