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편견을 다루는 법
지하철에서 유튜브로 직캠을 보다가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황급히 화면을 끈 적 있는가? 직장 상사나 학교 선생님이 “취미가 뭐니?”라고 물었을 때, “아, 그냥 음악 감상이요”라고 얼버무린 적 있는가? 가방 속에 든 앨범이 보일까 봐, 포토카드가 든 지갑을 열 때 누가 볼까 봐 주변을 살핀 적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라고 부른다. 마치 스파이가 신분을 숨기듯, 우리는 덕후라는 정체성을 철저히 은폐한다.
왜 그래야 할까? 우리가 마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내 돈 내고, 내가 좋아하는 문화를 즐기는데 왜 죄지은 사람처럼 숨어야 할까?
이유는 하나다. 세상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빠순이네”, “철 좀 들어라”라는 비아냥을 듣기 싫어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이성을 상실하고, 돈 개념 없고, 외모에만 집착하는 한심한 집단’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서 덕질할 텐가. 이번 챕터에서는 세상이 씌운 ‘빠순이 프레임’을 산산조각 낼 논리적 망치를 쥐여주겠다.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를 비난하는 그들의 시선이 ‘낡고 병든 것’일 뿐이다.
냉정하게 비교해 보자. 여기 두 명의 광적인 팬이 있다.
A: 40대 남성. 주말마다 야구장에 간다. 유니폼을 입고,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팀이 지면 밥도 안 먹고 화를 낸다. 수십만 원짜리 장비를 사 모은다.
B: 10대 여성. 주말마다 콘서트장에 간다. 응원봉을 들고, 목이 터져라 응원법을 외치고, 앨범 성적이 안 좋으면 속상해한다. 수십만 원짜리 굿즈를 사 모은다.
A에게 사회는 뭐라고 하는가? “열정적이네”, “취미 생활 확실하네”, “스트레스 풀리겠다”라고 한다. B에게 사회는 뭐라고 하는가? “빠순이네”, “공부는 안 하니?”, “부모님 등골 휜다”라고 한다.
하는 행동은 똑같다.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열정을 쏟는다. 대상만 야구팀에서 아이돌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A는 ‘건전한 취미’가 되고, B는 ‘한심한 일탈’이 되는가?
여기에 숨겨진 더러운 진실은 바로 ‘젠더(Gender)와 권력’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젊은 여성이 열광하는 것’을 항상 폄하해 왔다.
19세기 서양 의학계는 여성의 감정적 분출을 ‘히스테리(Hysteria)’라는 질병으로 취급했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이다.) 남자가 열광하면 ‘패기’나 ‘열정’이지만, 여자가 열광하면 ‘광기’나 ‘히스테리’로 규정하는 이중잣대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빠순이’라는 멸칭을 뜯어봐라. ‘오빠’와 ‘순이(여성 비하)’의 합성어다. 이 단어에는 “여자는 이성적이지 못해서, 잘생긴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홀린다”는 지독한 여성 혐오적 편견이 깔려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누가 너에게 “빠순이”라고 비아냥거리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불쌍하게 쳐다봐라. 그 사람은 지금 너를 욕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박힌 ‘전근대적인 성차별 의식’을 인증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너는 잘못된 게 없다. 그들의 낡은 안경이 문제다.
또 다른 공격 패턴은 ‘나이(Age)’다. “다 큰 어른이 아이돌을 왜 좋아해?”, “애들이나 보는 거 아니야?”
이 말에는 ‘대중문화(특히 아이돌) = 유치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문화’란 뭘까? 뉴스? 주식? 골프? 트로트?
그들이 K팝을 유치하다고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K팝을 ‘후크송에 맞춰 춤추는 재롱잔치’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K팝은 어떤가?
세계관(Storytelling): 마블 유니버스 뺨치는 복잡한 서사가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신화, 철학, SF, 심리학이 섞여 있어 해석하려면 논문 수준의 공부가 필요하다.
음악(Music): 전 세계 트렌디한 작곡가들이 모여 만든, 가장 세련된 사운드의 집약체다. 클래식 샘플링부터 힙합, R&B, 하이퍼팝을 넘나든다.
산업(Industry): IT 기술, 패션, 영상 미학이 결합된, 대한민국 수출을 견인하는 핵심 산업이다.
이걸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퉁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3분짜리 영상 안에 담긴 미학적 상징과, 앨범 재킷에 숨겨진 인문학적 메타포를 해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유치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가장 동시대적이고(Contemporary), 가장 감각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면만 보고 혀를 차는 그들이야말로, 문화적으로 도태된 ‘문맹(Illiterate)’에 가깝다.
철들라는 말에 상처받지 마라. 무미건조하게 늙어가는 것보다, 뜨겁게 무언가를 사랑하고 탐구하는 네가 훨씬 더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은 팬덤을 ‘기획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좀비’로 본다. “기획사가 만든 상품에 놀아나는 거야.”,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거야.”
정말 그런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너라면 알 것이다. 팬덤만큼 ‘까다로운 소비자’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노래가 구리면 구리다고 욕하고, 의상이 별로면 코디를 바꾸라고 트럭을 보낸다. 라이브 실력이 부족하면 연습하라고 닦달하고, 세계관 설정 오류가 있으면 기획팀보다 먼저 찾아내 지적한다.
우리는 좀비가 아니다. 우리는 ‘품질 관리자(QC Manager)’다. 우리의 기준은 웬만한 평론가보다 높다. 우리는 아이돌의 성장 서사, 무대 매너, 도덕성, 팬 사랑, 실력 등 수십 가지 항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입덕’을 결정했다.
그냥 TV 틀어놓고 멍하니 보는 머글들보다, 나노 단위로 쪼개 보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우리가 훨씬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수용자다.
우리를 세뇌당했다고 매도하는 건, 우리의 ‘비평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다. 자신 있게 말해라. “나는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야.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최고의 콘텐츠’를 선택한 거야.”
자, 이론 무장은 끝났다. 이제 현실에서 “아이돌 좋아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쭈글거리지 않고 우아하게 대처하는 화법을 연습해 보자.
Scenario A. “그 돈이면 저축을 하겠다. 아깝지 않아?”
(X) 하수: “제 돈 제가 쓰는데 왜 그러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O) 고수: “저는 이걸 ‘경험 소비’라고 생각해요. 여행 가서 돈 쓰는 거랑 똑같죠. 스트레스 쌓여서 병원비 쓰는 것보다, 문화생활로 멘탈 관리하는 게 훨씬 가성비 좋던데요?”
- 전술: ‘낭비’가 아니라 ‘멘탈 관리 비용(투자)’으로 프레임을 바꿔라.
Scenario B. “걔네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던데.”
(X) 하수: “아니에요! 자세히 보면 다 달라요.”
(O) 고수: “아, 처음엔 다들 그렇게 느끼시더라고요. 이게 ‘관심의 해상도’ 차이거든요. 저도 클래식 들으면 다 똑같이 들리는데, 전문가들은 다 구분하잖아요? 아는 만큼 보이는 거죠, 뭐.”
- 전술: 상대방의 ‘무지’를 탓하지 말고, 너의 ‘해상도(안목)’가 높음을 은근히 과시해라.
Scenario C. “그 나이에 아이돌이라니... 철 좀 들어.”
(X) 하수: “마음만은 10대예요 ㅎㅎ...”
(O) 고수: “요즘은 취향에 나이가 없잖아요. 오히려 트렌드 따라가려면 K팝만 한 게 없어요. 이거 놓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거든요. 부장님도 한번 들어보세요, 감각이 젊어지실 걸요?”
- 전술: 덕질을 ‘트렌드 학습’으로 포장하고, 상대를 ‘꼰대’ 위기로 몰아넣어라.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자신감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못한다. 네가 숨기고 부끄러워할수록, 그들은 더 집요하게 놀리고 비아냥거린다.
반대로 네가 당당하게 “어, 나 좋아해. 이번 앨범 진짜 명반이야. 들어볼래?”라고 나오면? 그들은 당황한다. ‘어라? 이게 부끄러운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취향을 남에게 납득시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의 취향을 ‘존중’하게 만들 수는 있다. 그 시작은 내가 내 덕질을 존중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그 세계는, 그들이 사는 세계보다 훨씬 다채롭고, 뜨겁고, 흥미진진하다. 그 건조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 오히려 불쌍해해라. 그들은 평생 가도 느껴보지 못할 그 벅찬 감동을, 너는 매일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제 일코 해제하고, 어깨를 펴라. 너는 ‘빠순이’가 아니라, ‘K-컬처의 최전선에 있는 문화 향유자’다. 그게 팩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