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 Dec 29. 2022

45. 나의 눈부신 친구(3)

명희에게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눈부신 친구를 찾아 헤맸다. 지난 글에서는 내가 찾는 것이 친구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내 인생에 눈부신 친구를 최근에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오늘 소개할 친구는 만난 지 1년 정도 된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이름은 심명희. 가명이다.


우리는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했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명희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그게 어쩌면 나의 눈부신 친구를 찾아가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명희의 첫 인상은 분명히 기억난다. 영화 모임에서 만났는데,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3살이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었다. 명희는 조용하고 약간은 주눅든 어린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명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명희는 자신만의 옳고 그름에 관한 경계를 분명히 갖고 있고, 자신감이 넘친다. 때때로 이것이 어린아이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조용하고 주눅든 어린이와는 거리가 멀다. 명희는 당당하고 우렁찬 어린이에 가깝다. 어쨌든 당시 나는 명희와 친해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명희는 어느날 내 삶에 찾아왔다.


명희와 나는 때때로 밤새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둘 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농담을 좋아했고, 상황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관점을 좋아했다. 우리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주변을 관찰하길 좋아했고, 주변의 상황을 우리의 관점으로 풀어내길 좋아했고, 그 관점이 어쩌면 비슷해서 우리는 즐거웠다. 우리는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상대였다. 


명희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는데, 유독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기가 편하다는 점이었다. 지인과 친구 사이의 관계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명희에게 속얘기를 했다. 명희는 주의깊게 들어주었고, 공감해주었다. 완전한 공감이란 없지만, 공감하려고 하는 모습이 내게 와닿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명희에게 했다. 명희는 평소처럼 유쾌하게 받아주었고, 나를 이해해주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우리는 슬픔을 나눴다. 비슷한 시기에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내가 실연의 아픔을 겪은 것은 명희의 영향이 컸는데, 명희에게 용기를 얻었다고만 말해두겠다. 우리는 다른 이유로 함께 아파했다. 물론 증상이 같았던 것은 아니다. 명희는 주로 분노했고, 나는 주로 침잠했다. 명희는 때때로 힘들 때 나를 찾아왔는데, 그때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데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명희가 나의 눈부신 친구가 될 수 있던 데는 슬픔을 나눈 데 있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슬픔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슬픔을 계기로 진정한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둘 다 소설을 좋아했고, 세상을 소설처럼 읽었다. 그래서 대화가 잘 통했다. 명희는 나의 생각들을 일깨워주었고, 우리는 그 생각들을 함께 발전시켜나갔다. 나는 우리가 어쩌면, 아주 나중에, 언젠가,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풀자면, 우리는 사람을 배와 항구로 나누길 좋아했다. 명희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왕가위 영화로 흘러간 적이 있다. 나는 왕가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유형을 이야기했다. 왕가위는 영화 관련 인터뷰를 할 때 사람을 공항과 비행기로 비유했다. 한 사람은 공항처럼 기다리고, 한 사람은 비행기처럼 떠나고 떠돈다. 명회와 나는 조금 더 전통적인 관점으로 사람을 배와 항구로 나눴다. 옛날 노래에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라는 말이 있다는 데서 착안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남자는 배이고 여자는 항구라는 것은 아니었다. 성별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배이고, 어떤 사람은 항구다. 명희는 항구 같은 사람이었다. 명희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 티켓을 슬쩍 보여주는 스타일이랄까. 명희는 헤어짐을 앞두고, 그 사람에게 떠나라는 통보를 내렸다. 명희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이 떠나길 바랐다. 그런 점에서 명희는 분명 항구라고 할 수 있었다.


명희는 항구로서 나와는 다른 인간관계에 관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명희는 사람과의 관계를 쌓아간다고 봤다. 그래서 함께 한 시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 동안 인간관계를 하나의 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맺어짐과 끊어짐만 있을 뿐 그 위에 무엇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간관계의 경중을 잘 따질 줄 몰랐다고나 할까. 반면, 명희는 쌓아온 시간에 관해 말했다. 그래서 때로 누군가에게 서운해 할 때 "쌓아온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쌓은 시간이 더 많은데 어떻게 시간으 거의 쌓지도 않은 그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어."


이 쌓는다는 개념, 그것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너무 사랑해서 끊으려던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만약 관계라는 것이 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쌓인 관계라는 것이 무너뜨리기 어려운 성과 같은 것이라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믿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기억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명희의 쌓기 이론은 내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희와도 쌓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쌓은 관계의 이름 중 하나는 '믿음'이다. 나는 항상 믿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사람이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신이건, 술이건, 사랑이건, 우리는 무엇이든 믿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명희는 내 말에 공감했고, 이 생각을 발전시켰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존재인가?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테마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명희가 나와 생각을 함께 눈덩이처럼 굴려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은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믿음만을 믿는다. 명희는 시간을 믿는다고 했다. 명희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퇴색되고, 의미 또는 가치가 변한다고 했다. 그 말은 반박할 수 없는 진리에 가까웠다. 우리는 힘든 시기에 항상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었다. 실제로 시간은 흘렀고, 우리의 힘든 마음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시간의 힘을 보고나니 궁금해졌다. 도대체 시간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간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한 순간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이므로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러면 명희는 어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명희는 항상 길을 걸을 때면, 계절을 감각했다. 흘러갈 계절이 아쉬워서 명희는 계절을 기억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명희는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순간의 반짝임도 믿는 사람이었다. 명희는 때때로 우리가 함께할 미래의 여름을 그리곤했다. 명희는 우리가 어느 여름에 한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함께 그 순간을 그리게 됐다. 그리고 명희의 순간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명희의 시간에 관한 믿음은 순간에 관한 믿음이며, 그것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명희만의 능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글을 쓰다보니 명희가 나의 눈부신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각자의 삶을 스스로 변화시켰다. 나는 명희로 인해 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관계의 쌓음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명희는 때때로 미래에 대해 확신에 가득차서 말하곤 하는데, 나는 그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믿고 싶어진다. 명희의 말에는 어떤 힘이 있어서, 내게는 분명 영향을 미친다. '나의 눈부신 친구'가 나의 삶의 궤적을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존재라면, 명희는 나의 눈부신 친구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우정에 관한 한 가지 은유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명희의 말대로 우리의 우정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우정의 순간들은 영원히 기억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쌓인 관계는 파도에도 무너질 수 없는 방파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라질 한순간의 영원한 우정에 이 글을 바친다.


p.s. 명희야 나는 가끔 꿈을 꿔. 우리가 한 여름에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큰 소리로 웃고 있는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 즐거운데, 다른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달라고 하겠지. 


  

작가의 이전글 44. 사랑의 형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