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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Part 1 교육

Part 1   프랑스 교육

Part 1 

프랑스 교육



결핍이 또 다른 결핍을 낳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나의 엄마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신의 20대, 30대, 40대를 갈아 넣어 조각해 놓은 딸이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게 목숨만큼 중요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사대문 안에 소재한 4년제 대학에 무사히 합격했다. 이 시절 엄마는 하루 4시간만 겨우 눈을 붙인 채 남들이 평온히 쉬고 자는 캄캄한 밤에 도시락을 들고 동대문 도매시장으로 출근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따가운 조명 아래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지는 유행가를 밤새 견디며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소매상들에게 여성 옷을 대량으로 팔았다. 엄마는 말 그대로 피땀 흘려 일해서 나의 대학 등록금을 댔고, 나는 그에 부응하기 위해 성적우수장학금을 받으며 해외 연수와 해외 인턴십을 거쳐 졸업식 전에 대기업 계열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엄마가 된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대학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라고. 특히 너희가 어른이 된 시대에는 현재 각광받는 직업들이 사라지고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직업들이 생길 수 있다고. 그러니 무엇보다 네가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 너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게 중요하다고. 그런 고민 후 대학이 필요 없다는 판단이 서면 굳이 안 가도 된다고 말했다. 


우연히 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친정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애들한테 대학에 안 가도 된다는 쓸데없는 

가능성을 심어 주냐며 불안해했다. 

나의 엄마는 대한민국 땅에서 60년대에 태어나고 80년대를 청년으로 보낸 386세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생계를 책임지는 첫째 언니와 남자여서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둘째 오빠를 위해 막내인 엄마는 초등생 무렵부터 밥상을 차렸다고 했다. 고등학교는 돈을 벌기 위해 상고를 선택했고, 졸업 후에는 바로 신문사에 취업해 미스김으로 불렸다. 부모 없는 가난한 여자에게 대학은 사치였고 여자의 결혼 적정연령기가 20대 초인 시절이었다. 언뜻 보면 중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앳된 21살의 엄마는 9살 차 나는 아빠를 만나 웨딩드레스 한번 입어보지 못한 채 새댁이 되었다.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전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차례 올린 전적이 있는 ‘돌싱’이었다. 성격 차로 신혼 때 이혼한 ‘과거가 있는’ 남자였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형편이 나아지면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는 아빠의 말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자연의 법칙처럼 신뢰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엄마는 진취적이고 추진력이 강하며 또래 남자들보다 어른스러운 아빠에게 푹 빠졌다고 했다. 철없던 엄마는 친척 어른들의 반대에도, 형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를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주부가 되었고 곧바로 나를 임신했다.


어릴 적 나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할 겨를조차 없었다. 엄마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게 나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 

아빠는 가족을 가족답게 만드는 법을, 자식과 아내와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다. 사업을 핑계로 허구한 날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밥 먹고 잠자는 공간으로 집을 사용했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 신뢰가 무너지고 불통의 벽이 두터워질수록 신을 향한 엄마의 신앙심도, 나를 향한 엄마의 애착도 돈독해져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는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나는 엄마의 미래이자 꿈이었고 현재 삶의 목적이었다.

엄마를 살리기 위해 나는 그렇게 존재했다.  


하숙 치는 아줌마처럼 인생을 보낸 엄마는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다. 딸이 일류 대학을 졸업한 후 커리어 우먼으로 멋지게 사는 모습을 통해 세월에 짓밟힌 자신의 꿈을 만회하고 싶었다. 한평생 건강 관련 사업에 매진한 아빠 또한 딸이 의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정작 나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내가 누군지 몰랐고 늘 자신감이 없는 불안한 소녀였다. 

한창 이민 바람이 불던 2000년 밀레니엄이 오기 바로 직전, 부모님은 외동딸을 홀로 영어권 국가에 유학을 보냈다. 아빠의 사업이 유일하게 반짝 번창하던 황금기 시절이었다. (그 후로 사업은 다시 휘청였고, 일 년에 한 번 내 등록금과 홈스테이 비용을 내야 하는 연말에만 신기하게도 사업이 풀리는 바람에 유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환율이 1달러에 500원대로 엄청 저렴했고, 한 번도 왕래하지 않았던 먼 친척이 이민을 위해 그곳에 몇 달 먼저 정착해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국으로 나라만 옮겼을 뿐 그곳에서조차 나는 홈스테이 집과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몰두하며 착실하게 살았다. 각종 인종차별과 외로움을 견디며 4년이라는 배고픈 유학 생활을 버티다 의예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간신히 유지되던 아빠의 사업이 완전히 부도나는 바람에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나이 21세에 한국에서 재수생이 됐다. 


돌아보면 유학 생활의 가장 큰 수확은 엄마와 떨어져 있던 그 시간 자체였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 건 맞지만, 일상에서 내가 옳다고 여기는 걸  선택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난생처음 해볼 수 있었다. 그 시절이 나를 좀 더 단단하게 다져줬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며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이 왜 좋은지 뼈저리게 경험한 것도 훗날 프랑스 도전에 큰 영감을 주었다. 열몇 개의 과목을 죄다 달달 외워서 등수를 매기고 줄 세워서 대학을 보내는 한국과 다르게 뉴질랜드는 내가 진정 원하는 과목을 4~5개만 선택해서 심층적으로 공부했고, 관심 분야가 바뀌면 언제든 담당 선생님과 상의 후 과목도 변경할 수 있었다. 시험문제도 모든 과목이 단답식이 아닌 논술시험이라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답을 풀어가는 과정으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뉴질랜드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찾아 선택하는 특권을 갖는다. 비록 의대에 가야만 했던 나는 그 선진 시스템의 수혜를 누리지 못한 채 죽도록 싫어하는 미적분, 통계, 생물, 화학, 물리를 억지로 공부해야 했지만. (난 뼛속까지 문과지만, 저 때는 의대 진학을 위해 이과 과목을 선택했다.) 

이런 경험 덕분이었을까.

내 아이들만큼은 모든 사람이 좇는 경쟁시스템에 내몰려 틀에 박힌 공부를 하길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며 자신감을 키우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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