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치원 현장학습
부르델 미술관 Musée Bourdelle
둘째 아이의 프랑스 유치원에서는 여러 현장학습과 소풍이 있었지만, 그동안 나는 한 번도 따라가지 못했다. 예민하고 경쟁심이 강한 첫째 아이의 성향과 반대로 둘째 아이의 성격은 온순하고 낙천적이며 둥글둥글하다. 첫째 아이처럼 현장학습에 같이 가달라며 강력히 요구하지 않아 신경을 덜 쓰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먼저 현장학습 참여를 권유해 주셨다. 지난번 현장학습 때 둘째 아이와 제일 친한 친구의 엄마가 동행했는데 그걸 보고 아이가 서운해하는 거 같았다며 선생님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 지난번 첫째 아이의 현장학습에서 다른 학부모들처럼 선생님과 아이들을 옹골차게 도와주지 못하는 내 처지가 뻘쭘했다. 아무리 공부해도 현장학습에 보탬이 될 만큼 불어 실력은 늘지 않아 자신감마저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부담스러운 자리를 피해 다녔더랬다. 둘째 아이는 내가 미술관 견학을 따라갈 거라 말하니 세상 다 가진 거처럼 신이 나며 환호했다. 그런 들뜬 아이의 표정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장학습 장소는 학교 근처에 소재한 부르델 미술관(Musée Bourdelle) 이었다. 로댕과 더불어 조각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에밀 앙투안 부르델(Emile 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부르델은 로댕의 제자이기도 했다. 2주 전에도 아이들은 같은 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여인 메두사를 만드는 아틀리에에 참여했다.
오전 10시에 출발한다고 하여 10분 전에 학교에 도착하니 다른 학부모들도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3명, 나를 포함한 엄마 3명 이렇게 총 6명의 어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역시 프랑스는 한국에 비해 아빠 육아가 참 적극적이다. 세 분의 선생님과 함께 시끌벅적 대며 강당을 향해 내려오는 귀여운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부모들은 일제히 같은 종류의 함박웃음을 짓고는 각자의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째 아이는 환히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와 와락 안겼다.
아이들은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학교 밖으로 나갈 때는 노란색 형광조끼, 목걸이, 명찰을 필수로 착용해야 한다. 이에 익숙한 듯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나눠주는 조끼를 빠른 속도로 입고 명찰을 목에 걸었다. 학부모들에게는 돌봐야 할 아이들의 명단이 주어졌다. 난 둘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베스트 프렌드인 시몽 그리고 여자아이 이네스 이렇게 세 아이를 맡았다. 둘째 아이와 시몽은 같은 조라며 서로를 붙들고 좋아했고, 조용한 성격의 이네스는 내가 자신의 보호자인 걸 확인하고는 내 곁으로 와 수줍은 듯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큼지막한 노란 조끼를 걸쳐 입고 병아리처럼 질서 있게 걷는 앙증맞은 유치원생 무리를 파리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해맑은 아이들이 지나갈 때면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지며 길을 비켜주게 된다. 이날도 우리를 스쳐 가는 많은 파리지앵이 아이들의 행진이 원활하도록 웃으며 길을 터주었다.
부르델 미술관은 일반 주택들 사이에 위치한 소박한 정원이 딸린 작은 규모의 미술관이다. 부르델이 살았던 집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거라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한다. 부르델이 작업했던 아틀리에 공간과 살림집이 1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대형 전시실에서 아이들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르델이 모티브로 삼은 그리스 신화와 등장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술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열심히 대답했다. 아이들은 이미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님과 함께 그리스 신화를 살펴봤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들었고, 메두사의 비극적으로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리스 신화 인물은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와 ‘죽어가는 켄타우로스'가 있었다. 반인반마인 켄타로우스의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부르델의 대형 작품은 로댕의 조각품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대체로 로댕의 작품보다는 덜 섬세한 반면에 감정의 힘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둘째 아이를 포함한 남자아이들은 역시 화살을 든 헤라클레스 작품을 제일 좋아했고 장난꾸러기 둘째 아이는 친구 시몽과 함께 설명을 듣는 내내 활 쏘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아틀리에에서 미술관 선생님의 시범을 먼저 지켜본 후, 배에 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를 찰흙과 이쑤시개 모양의 기다란 나무 막대기로 만들었다. 고사리손으로 찰흙을 조몰락거리며 열심히 집중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얼마나 진지한지 꼬마 예술가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과 프랑스어로 소통이 안 되니 다른 학부모들이 내가 맡은 아이들을 대신 도와주어야 했다. 덕분에 엄마가 눈앞에 보이니 유독 어리광을 피우는 둘째 아이에게 달라붙어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물론 아이 양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très bien!”, “super!” 같은 감탄사를 계속 내뱉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프랑스 공립 유치원을 다니니 아이는 자연스럽게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 하는 그리스 신화를 수업에서 접하고 있다. 학창 시절 고전이기에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책을 사두고 몇 장 읽다 지겨워져 집어던진 기억이 있는데 지금에서 그리스 신화를 들여다보면 참 흥미롭다. 그리스 신화가 때로는 극단적으로 잔인하고, 괴기하고, 변태적이고, 상식 밖이긴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게 인간을 이루는 속성 아닌가. 실수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배신하고, 꾀고, 싸우고, 죽이고, 후회하고, 복수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모험을 떠나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본질을 들여다보며 인간이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서양 문명의 문화와 문학과 예술과 정치가 발전한 것이고, 그 열매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그리스 신화를 알면 인간을 이해하는 데도 의식을 확장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래동화나 어린이 만화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선징악 구조의 단순한 서사보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그리스 신화가 훨씬 유익해 보인다. 물론 아이들의 수준과 나이에 맞게 걸러야 하는 부분도 꽤 있고, 상상 이야기에 불과한 전설일 뿐이지만, 그리스 신화가 인간에 대한 상당한 통찰을 담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선과 악이 존재하는 건 믿지만 현실에서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세상엔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도, 아동 성범죄자, 인신매매범, 연쇄살인범 같은 악인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선과 악의 극명한 차이를 보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다. 더구나 선과 악의 개념도, 정의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면 선한 사람일까? 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선한 사람일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법 자체는 선한 걸까? 반대로 살인하고 도둑질하면 무조건 다 악한 사람일까?
선을 추구하며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이분법적으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분명하게 나누는 서사가 불편하다. 자기만의 잣대로 행한 선한 행실로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믿음보다 내면의 악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외려 선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둘째 아이와 함께한 현장학습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뜻깊은 시간이었다. 둘째 아이와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 어울리는지 관찰할 기회라 더 좋았다. 내가 좀 부담되고 불편하더라도 아이를 위해 이런 기회를 더 자주 만들어야겠단 다짐을 하며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