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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Part 2 프랑스 나들이

도망자에서 유랑자로



나는 도망자였다. 

실패가 두려워 안전한 길만 선택했다. 바람이나 재능보다 목표를 늘 한 뼘 아래로 잡았다. 다행히 운이 좋아 낮은 목표치만큼 성실히 노력한 대로 결과가 따랐다. 그 성취에 부모님은 적당히 만족했고, 친구들은 질투했다. 

그게 패턴이 될수록 계속해서 안전한 선택에 안주했고,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은 욕망은 사라졌다. 그렇게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도전’보다는 ‘시도’를 택했다. 영국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고, 국제학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경제학을 공부했다. 아나운서나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해외마케팅팀에서 근무했다. 

대학에서 국제무역법 관련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때는 며칠 동안 열심히 PPT 자료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차례가 올 즈음에 그 수업을 취소해 버렸다. 대신 상대적으로 손쉽게 만점을 받고 학점을 높일 수 있는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나의 그릇으로 절대 아나운서나 기자가 될 수 없을 거라 확신했기에 그 분야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면 무조건 대기업을 가야 한다는 부모님 등쌀에 그나마 한국계 대기업보다는 외국계 다국적기업에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꼭 1, 2차 면접을 통과하고 나서 마지막 영어 면접에는 불참했다. 내 깜냥 밖이라 생각하니 강력한 저항을 느꼈고 도망갔다. 

필기시험과 두 번의 심층 면접과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2개월간 인턴 기간을 거쳐 어렵게 합격한 회사에 들어가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날 때마다 버거웠다. 꼭 가고 싶었던 기업도, 하고 싶었던 업무도 아니니 자부심이나 소명감 없이 월급에 중독된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2년 가까이 일하고는 도망치듯 퇴사했다. 

아나운서나 기자에 한 번이라도 도전해 볼걸,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 볼걸,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조직에서 맡겨진 일에 과감하게 임해 볼 걸이라고 지금에서야 다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지만, 그 당시에는 두려움에 잠식돼 도망치기 바빴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서 도망을 선호했을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데 왜 그렇게 실패가 두려워 한계를 그으며 나 자신을 가두어 뒀을까? 그래서 포기하는 쉬운 길을 선택해서 결국 후회하는 삶을 살았을까? 

아빠는 무모할 정도로 사업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누구 밑에서 지시받는 걸 싫어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넘쳐 20대 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특허권만 100개가 넘는 일 중독자이기도 했다. 손 모양 플라스틱에 찍찍이 부직포를 붙여 캐치볼을 할 수 있는 장난감도 일인용 퍼팅 연습기에서 친 골프공이 다시 돌아오게 경사를 고안해 제작한 기구도 아빠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진득하니 사업을 일으키는 법을 몰랐고 결정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사업이 좀 잘 나갈 거 같다 싶으면 뺏기고 사기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아빠의 무책임한 도전은 멈출 줄 몰랐다. 매년 사업 아이템과 주거지가 바뀌었고, 그럴 때마다 부채와 함께 엄마의 스트레스도 복리로 불어났다. 아빠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정상화하는 건 늘 엄마의 몫이었다. 은행과 사채를 넘어 친척과 지인들에게까지 진 빚도 가정주부였던 엄마가 밤마다 동대문 도매시장에 나가 옷 장사를 하며 갚았다. 아빠 사업에 빌려준 엄마의 명의도 채무불이행으로 엉망이 됐지만, 이를 악물고 회생시켰다. 대포차가 된 자동차도 경찰서와 법원을 수년 동안 넘나들며 해결했다. 

그럴수록 엄마 안에는 아빠를 향한 불신과 불만이 깊어져 갔다. 외모와 성격이 아빠와 판박이인 나에게 아빠에게 미처 풀지 못했던 감정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그런 엄마는 어린 시절 나에게 사랑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매우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어린 나는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도전하면 실패하고, 실패하면 싸우고, 싸우면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는 우울하고 불안정해진다는 인과를 목도했다. 아빠의 부재가 빈번한 만큼 나를 향한 엄마의 폭언과 폭력도 잦았다. 

자연스레 ‘도전과 실패는 나쁘다’는 인식이 내 안에 뿌리 깊게 박혔다. 무엇보다 아빠를 닮은 내가 잘못됐다고 인식했고, 아빠를 답습해서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을 묵살하고 ‘착한 엄마딸’로 살기로 했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고, 반항하지 않는 딸. 엄마가 대리만족할 수 있는 엄마의 분신으로 엄마에게 밀착해서 사는 삶.

서로에게 집착하고 의존하며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기생적이고 괴기한 관계로 살았다. 

엄마는 칭찬에도 인색했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완벽주의 엄마는 나를 보면 항상 부족한 부분만 찾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 내 칭찬을 하지 않았고, 외려 나의 못난 부분을 꼭 내가 함께 있을 때 만인 앞에 들춰내고 깎아내렸다. 그럴 때마다 난 얼굴이 새빨개지며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나중에 내 아이들을 낳고 엄마에게 왜 꼭 사람들 앞에서 나를 혼내거나 나의 단점만 얘기하고 흉을 봤냐며 속상한 마음에 따지듯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말했다. 그렇게 다른 엄마들이 자기 자식을 입이 아프도록 칭찬하는 게 꼴불견이었다고. 그래서 엄마는 자식의 부족한 점만 나눔으로써 다른 엄마들을 민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사람들이 오히려 내 칭찬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어차피 내가 엄마 친구의 아이들보다 공부도 더 잘했고, 엄마 말도 더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였기에 항상 자부심이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린 나에게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얘기해 주지, 칭찬이 뭐 그리 어렵다고 늘상 비교는 그렇게 잘했으면서 칭찬 한번 안 해준 엄마가 야속했다. 

엄마의 의도는 알겠지만 자기 체면의 수단으로 아직 마음이 여려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어린 나를 사용했다는 것도 억울했다. 

독일 심리상담가인 우르술라 누버는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RHK]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칭찬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면, 잘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고 잔소리만 들었다면 당신도 스스로 무언가 성취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격려를 받을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가 실수만 꼬집고 잘한 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당신은 지금도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 마지못해 일을 하거나 아예 손을 대지 않게 된다. 당신은 실패를 언제나 자신의 그릇된 행동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실패를 하면 "난 되는 일이 없어!" 라면서 낙담한다.

내가 엄마의 뜻을 거스른 유일한 반항은 짝지와의 결혼이었다. 사람은 좋지만, 집안, 학벌, 직업 같은 스펙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5년 연애 기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내가 북경으로 몇 주간 어학연수 갔을 때 허전해하는 엄마를 위해 도시락과 과일을 직접 넉넉히 싸서 100송이 장미를 들고 엄마의 일터에 찾아가고, 아빠가 급성 맹장염 수술로 입원했을 때 직접 아빠를 목욕시켜 줄 정도로 다정한 남자친구의 면전에 엄마는 이렇게 대놓고 말했다. 

“너는 딱 아들 삼았으면 좋겠다. 사위로는 부족해. 너도 알지?” 

결혼 승낙을 안 해주면 집을 나가겠다는 27살이나 먹은 다 큰 딸의 가출 선언과 협박에 못 이겨 엄마는 마지못해 장단을 맞췄다. 우리는 한 달만에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감행한 결혼이 내 인생 통틀어 한 선택 중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내 속도에 맞춰 성장하도록 격려해 주고, 영감을 주고, 이끌어 주면서도 나의 가장 더러운 바닥까지도 보일 수 있고, 그 모습조차 감싸주며 사랑해 주는 이 세상 유일한 존재니까. 그런 짝지와 마음이 맞아 프랑스까지 갔고 프랑스를 간 선택이야말로 도망자였던 내가 주체 의식을 갖고 나를 찾는 ‘유랑’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도망’은 어떤 대상, 사건, 기억, 의식, 장소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발버둥이라면, ‘유랑’은 내가 진정한 나, 참 자아를 찾기 위해 주체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여행 같은 삶이다. 그렇게 프랑스 안식년은 나를 ‘도망자’에서 ‘유랑자’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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