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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파리 금반지 사건

햇살 좋은 어느 날은 집에서부터 걸어 나와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센강을 옆에 끼고 뤽상부르 공원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날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내가 먼저 앞장서서 걷고 짝지는 나란히 내 뒤를 걷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서 색이 바랜 가죽 재킷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걷던 밝은 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 아저씨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르메니아인 같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땅에서 무언가를 줍는 게 아닌가. 아저씨는 땅에 떨어져 있는 반짝이는 누런 금반지를 발견하고는 그걸 주워서 나를 의식하며 횡재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금반지를 꼼꼼히 살펴보며 진짜 금인 거 같다는 표정으로 반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도 신기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정말 진짜 금이냐고 물었다. 내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 발견했어야 했는데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아저씨와 금반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짝지도 신기하다며 아저씨와 금반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아저씨는 아쉬워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이 반지를 네가 그냥 가지라며 불현듯 내 중지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선 별안간 나의 하루를 축복하고 내 인생을 축복하는 말들을 그날따라 유난히도 청명한 하늘을 두 손으로 겸손히 가리키며 하였다. 반지를 그냥 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 반지는 애초에 하늘이 너에게 주라고 하는 거 같다며 나보다는 네가 갖는 게 유익할 거 같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로또를 맞은 기분이었다. 진짜 주는 거냐며 어리둥절해하는 짝지에게도 손에 입을 맞추고는 축복의 말을 전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뭐에 홀린 듯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아저씨와 헤어졌다.


그렇게 그 아저씨와 우리는 등을 지고 횡당보도 앞에 서 있었다. 파란 불을 기다리며 짝지와 나는 흥분 상태였다. 반지 안쪽에는 18k라고 명확히 적혀있었고 무게도 석 돈 정도 나가 보였다. 이 정도면 40만 원은 족히 넘을 거라는 계산이 절로 나왔다. 그때까지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보며 파란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불이 들어오자마자 아저씨는 횡단보도를 건너 빠른 걸음으로 왼쪽 길로 갔고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짝지가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향해 고마운 마음을 담아 큰 목소리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마지막 인사를 들은 아저씨가 느닷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방향으로 틀어 짝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선 돈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빵 사 먹을 돈이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했다. 이 상황에 우리는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금반지도 받았겠다 더구나 배고프다는 말에 열심히 가방과 주머니를 뒤지며 현금이 있는지 확인했다. 동전까지 싹 긁으니 17유로가 겨우 나왔다. 아저씨는 너무 적다며 더 달라고 했다. 우리는 카드를 보여주며 미안하지만 카드밖에 없다고 말하니 그제야 아저씨는 실망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갔다.

사기일 거 같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반지가 너무나도 리얼했고, 아저씨가 다짜고짜 돈을 요구한 게 아니라는 점에 사기가 아닐 거라 판단했다. 반지를 현금화하기 어려워서 우리에게 준 게 아닐까, 그 사람이 이 금반지의 가치를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 갖가지 억측으로 우리에게 떨어진 이 반지가 진짜이길 바랐다. 그리고 며칠 후,

주말을 맞아 튈르리 정원을 가기 위해 센강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 지친 나를 두고 짝지와 아이들이 먼저 앞섰고, 나는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노숙인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우리 금반지를 내 옆에서 주워서 손을 내밀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짝지가 뛰다가 칠칠찮게 흘린 줄 알고 급한 마음에 할아버지에게 그거 우리 거 맞다고 고맙다고 말하고는 그 반지를 얼른 낚아채서 짝지를 부르며 뛰어갔다. 내 뒤통수에 대고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말을 뒤로한 채 짝지를 따라잡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빼앗다시피 가져온 반지를 보여주며 짝지의 등짝을 내리쳤다. 평소 꼼꼼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짝지는 그 반지를 보자마자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가방 안쪽 주머니 지퍼를 허둥지둥 열었다. 그러고는 내가 들고 있는 반지와 똑같은 반지를 꺼내 보여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반지는 17유로에 구매한 꼴이고, 두 번째 반지는 사기꾼 할아버지를 본의 아니게 참교육시킨 꼴이 됐다.

파리에는 소매치기나 여러 종류의 사기행위가 많다. 대부분 중동이나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다. 그래서 의심스러운 낯선 사람이 어떤 물건을 건네주거나 말을 걸면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걸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잘 피해 다녔건만 또 이런 방식으로 신종 사기에 걸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첫째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 만 7살을 15일 앞둔 아이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진짜 금이었으면 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줬겠어. 자기가 가지지. 가짜 금인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순간 어른인 우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금반지가 진짜 금이길 내심 바라며 허상을 붙들고 있던 어른들의 추잡한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릴 때, 순수한 아이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그리고 투명하게 꿰뚫고 있었다. 

반면에 어른인 우리는 진짜 금이라면 왜 우리에게 줬을까 고민해 봤지만, 금반지를 팔 수 없는 신분일 거야, 가짜 금이라고 착각하지 않았겠느냐고 꿰맞추며 우리 입맛에 맞는 해석을 늘어놓기 바빴고 덕분에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스쳤다. 


욕심 없이 냉정히 보면 당연한 건데 욕망이 곁들여지니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그러다 보니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되고 어느새 실체조차 아리송해지고 마는. 아이의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통찰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 느꼈다. 

가짜 금반지 사기 사건에 불과한 이 재미난 에피소드가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 절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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