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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cilk Jun 24. 2020

김훈의 글

김훈의 소설 <공무도하>를 겨우 다 읽고


나는 김훈의 문장에서 필연적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떠올리곤 한다. 문장에서 모든 군더더기들을 솎아내는 일은 어쩌면 대학 시절 내내 내게 가장 낯설고도 중요했던 작업이기도 했기 때문일 거다. '기사'라는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문장이 주체할  없을 정도로 길고 툭하면 주어가 실종되며 온갖 수식어와 허세가 가득하다는  깨달았다. 김훈의 문장에서는 그런 군더더기들을 솎아내는 일에 대한 강박(혹은 습관) 느껴지곤 한다. 지독하게 간단한 문장으로 무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처음 깨달았던 것도 김훈의 문장에서다. 그리고 사실에만 의거하여 쓰는 기사가 어째서 사실이기만   없는지에 대한 김훈의 고뇌나 탄식같은 것들이 좋았다. '자신의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 없으면  한줄도   없다며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던 김훈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좋아서, 회사 입사시험 때도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쓰라는 문제에 김훈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썼던  같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김훈의 소설이 재미 없다고 생각한다. 밥벌이의 지겨움과 자전거 여행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고  읽었던 내가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내용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공무도하,  젊은 날의 숲은 읽다 말고 던져놓은 이유는 말이다.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다. 오래전에 읽다  공무도하를 마저 읽으면서도, 소설적 재미보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속해 있었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김훈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ㅡ주인공의 직업이 기자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ㅡ 포기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가며 꾸역꾸역 끝까지 읽어냈다.  젊은 날의 숲이나 흑산에 대한 기대도 사실 크지 않다. 이건 실망같은 것이 아니다. 김훈의 소설이 어떻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책은 앞으로도 계속 사고,  재미없다며 읽다 말기를 반복하고, 하지만  지금처럼 언젠가는 꾸역꾸역 끝까지 읽어내고  거다. 김훈의 문장은, 김훈같은 문장으로 쓰여진 소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부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부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도 또한 아니다. 존재와 증명 사이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다는 전제도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증명되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긍정할 수 없는 것이 과학의 고충이다. 이해를 바란다.


기름을 먹은 붓으로 캔버스를 칠할 때 붓끝에서 손목과 어깨로 달려드는 기름의 질감은 여전히 버거웠다. 몸이 기름 속으로 녹아들지 않았고, 기름이 몸과 붓 사이에서 미끈거렸다. 노목희는 기름으로 그리기를 포기했다. 노목희는 수채 색연필로 그렸다. 색의 층을 겹쳐서 색과 색 사이의 구획을 지우고 그 위를 젖은 붓으로 문질렀다. 색들은 물러섰다. 색들은 구도의 뒤쪽으로 밀려나면서 저물었고, 저무는 자리에서 다시 동터왔다.



색들은 물러섰다.
이 한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서 있었다. 나는 이래서 김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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