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라미 Apr 19. 2019

크고 작은 하루 5일째, 피의 금요일

신기할 정도다.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마다 생리가 시작되는 것은. 베를린으로 출발하면서 배가 살살 아프더니 설마는 역시였다. 나는 보통 첫 이틀 중 하루를 생리통때문에 아주 앓아눕곤 한다. 어떤 날은 통증이 너무 심해서 가만히 누워있지도 못해 데굴데굴 구른다. 첫 직장에서 하루는 2시간 걸려서 겨우 출근을 했는데 모니터 앞에 앉으니 통증 때문에 눈물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사무실 책상에 계속 앉아있자니 남들이 신경쓸 것 같아 결국 차가운 화장실로 피신했고, 앉아 있다 발을 동동 구르다를 반복했다. 그 차가운 변기와 밑이 빠지는 듯한 통증은 언제 떠올려도 생생하다(다행히 그날은 양해를 구하고 조퇴할 수 있었다-부사장님 만세). 이런 심한 생리통은 정말 답이 없다. 진통제도 들지 않고, 누워도 편할 수 없고, 그저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인생급 생리통은 아니었지만 찐하게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통에 도저히 나갈 수도,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서울에서 전시를 함께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내 쪽에서 보내주어야 할 내용을 어서 준비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어서 심적 부담이 커져 있었다. 결국 나는 오늘 하루 숙소에 남기로 했다. 사실 베를린에 수아와 동행하기로 한 것은 그의 좋은 여행 사진들을 남겨주러 온 것이 적지 않았는데, 오늘 수아 혼자 돌아다니게 할 수밖에 없어 정말 미안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나눈 짤

4월 12일 오늘의 날씨 및 베를리너의 코디 : 다시 패딩. 기온은 10도를 못 미침, 해 없음, 특유의 스산함.

일정을 분리하기로 결정한 뒤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Hallesches Haus'는 한켠에 편집샵 General store를 끼고 있는 멋진 브런치 카페다. 음식과 커피가 맛난 것은 물론 한쪽에 노트북 펴놓고 작업할 수 있는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듯하다. 유럽 카페는 공간 특성상 오래 앉아 있으면 추울 때가 자주 있는데 여긴 그렇지 않아 좋았다. 코코넛 치아 보울과.... 저게 뭐였더라, 두 가지 메뉴를 시켜 수아와 나누어 먹었다. 음식은 4.5점, 커피는 3점 드립니다.

Hallesches Haus & General Store, Tempelhofer Ufer 1, 10961 Berlin


와중에 이 분은 왜 이리 귀여우시죠... 아직 비몽사몽한 수아와 아빠 다리 사이 양말의 얼굴

한국의 카페는 이제 프랜차이즈든 아니든 공유 오피스를 방불케 한다. 학생, 수험생, 프리랜서, 직장인 할 것 없이 책상 위에서 처리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오천 원가량의 커피값을 몇 시간의 동안의 자릿세로 내고 자기 자리를 얻는다. 거의 매일 특정 시간대에 같은 자리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있다 보니 서로 인사는 나누지 않더라도 일종의 대단히 느슨한 임시 공동체를 이룰 정도다.


이런 한국 카페 문화는 알고 보면 제법 독특한 종류의 것이다. 평소 스*벅스나 투*플레이스 등에 나와 일하는 시간이 길었던 나는 유럽에 나와서야 카페는 본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공간, 담소를 나누는 장소임을 다시금 확인했던 것 같다. 테이크아웃보다는 앉아서 마시는 수가 당연히 많고, 대도시에서도 장시간 앉아서 노트북을 할 수 있는 분위기의 카페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천장이 높고 녹색이 어우러진 카페 인테리어도 아름답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집중해서 나누는 대화야말로 흠모할만한, 훔치고 싶은 문화다. 카페가 일하러 가는 공간, 밥 먹고 헤어지기 애매해서 자동적으로 발걸음 하는 2차적 공간이 아니라 생각을 꺼내는 공간,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공간에 조금 더 가까울 테니.

독일에서 거의 처음 바깥 카페에서 일해보는 듯



수아는 먼저 관광 길을 나섰고, 나는 세 시간가량 1인용 테이블에서 해야 할 작업을 돌봤다. 하루 중에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 숙소로 떠나기 전에는 편집샵을 간단히 둘러보았다. 다양한 브랜드의 리빙 소품, 의류, 문구 등을 판매하고 있다. 예쁘고 재밌고 비싸다. 출입구 근처에 베를린 각 동네 별 가이드맵을 무료로 비치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가져가도 좋겠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아시안 마켓도 하나 있으니 참고. 컵라면을 두 개 얼른 사서 숙소로 돌아가 웅크리고 누워서 쉬었다.


대충 살자 베를린 차도 표시처럼

W.. E.. L... O... V.... E.... B.... E.... R... L... I.... N

해가 질 무렵 수아가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온 수아도 지친 기색이었다. 이 친구 보아하니 자기 아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나 보다. "저 열이 혹시 있나요?"라고 묻기에 내 이마와 수아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제법 뜨거웠다. 차갑게 바람 부는 날씨에 스카프 한 장도 없이 베를린 돔, 미술관 하나, 하케셔막트 근처의 힙한 공간들을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는데, 얼마나 많이 걸어 다녔는지 그제야 다리도 많이 아프다고 했다. 점심에는 비싼 파스타를 시켰는데 너무 피곤해서 끝까지 먹을 수가 없었다고. 오 작고 가여운 여행자여. 자꾸만 어떻게든 '뽕을 뽑고' 싶어 지는 여행자 마인드는 참 곤혹스러운 것이다.


쓰러지듯 잠든 수아가 한 시간여 만에 일어났고, 우리는 집 근처 케밥집을 향했다. 독일에서 케밥이라니, 조금 의아스럽겠지만 이유가 있다. 독일에 거주하는 가장 많은 수의 외국인은 알고보면 터키인이다. 근 몇년간 힙한 동네로 이름을 올린 크로이츠베르그Kreuzberg도 터키인들이 모여사는 동네. 그들의 거주가 하루아침 일이 아닌 만큼 이제는 케밥 또는 되너Doener, 뒤룸Duerum도 독일에서 먹어보아야 할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간 곳은 제법 유명한 가게여서 밤중에도 줄을 섰다. 집에 가지고 들어와서 넷플릭스로 영화 <인턴(2015)>을 보며 먹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벤'의 반듯한 생활은 자꾸만 우리 아빠를 떠올리게 해서 슬프다. 수아는 뒤룸을 거의 한 입밖에 먹지 못한 채 도로 잠이 들었다.

무스타파 야채 케밥Mustafa's Gemuese Kebap. Mehringdamm 32, 10961 Berlin

매거진의 이전글 크고 작은 하루 7일째, 164걸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