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있으면서 네이버 검색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유학 준비 중에 해외 학교와 도시 정보를 얻으려면 더 이상 국내 정보들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글을 통한 영문 검색에 익숙해지면서 네이버라는 포털 사이트가 한국인들이 집단지성 형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더욱 실감한다. 자잘한 상황과 경험을 빼곡히 기록한 블로그 및 카페 게시글, 무수히 많은 수의 지식인 질문들을 보고 있자면 인터넷 강국의 국민들답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를 얻는 주요 창구가 한 웹사이트라는 건 당연한게 아니다. 예전에 한 번은 독일의 모 행사 후기를 찾으려고 독일인이 쓴 블로그 글을 검색하려 했는데, 이내 블로그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독일인이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특히, 여행에 관해서라면 가성비와 가심비를 열심히 따지는 우리네 필요에 최적화된 인기 루트 정보와 후기가 계속해서 공유된다. 숱한 여행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대표 관광지는 물론 건물 외관으로는 식별이 어려운 현지 힙스터 성지의 가게, 카페, 서점, 바 등이 함께 이야기된다. 최근에는 유럽의 소규모 가게들이 파는 판촉 에코백을 모으며 돌아다니는 '에코백 투어' 루트가 유행인가 보다. 한국인의 보편적 취향을 쏙쏙 겨냥한 정보들을 현지에 가보기 전에 알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여행자에게 큰 도움이겠지만, 나는 여기서 조금 주춤한다. 우리 모두가 유사한 경험들을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에 익숙해진다는 게 어쩐지 좀 무섭다. 실수 없는 여행을 바라는 마음 뒤에 가려진, 효율에 집착하는 태도에 익숙해지는 게 두려운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 모험이나 각자의 방식대로 발견하는 일이 바보 같고 피하고 싶은 과정으로 인식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라고 진지충이 생각했습니다. 수아는 전날 밤 다음날 일정을 정하기 위해 주로 네이버 검색을 통해 정보를 모았다. 후다닥 자기 입맛에 맞는 여행 지도를 완성하는 수아를 보니 비슷한 정보가 계속 재생산된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 편집, 큐레이팅 할 수 있으니까. 덕분에 오늘 나는 수아의 지도를 좇아, 나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이곳저곳을 함께 걸었다.
추운 베를린 날씨와 치미는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지 수아는 전날부터 감기 기운과 두통이 있었다. 제일 먼저 약국에 가서 약을 얼른 사 먹고 씩씩하게 일정을 시작했다. 첫 행선지는 베를린 장벽이 1.3km가량 남아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2006년 기존에 위치에서 40m가량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거의 그 자리에서 독일의 분단과 통일의 명징한 증거로서 남아있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진 후 찾아온 첫 봄에 21개국 118명의 예술가들이 벽화를 남겼다.
베를린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단연 저 키스하는 두 아저씨 벽화일 것이다. 러시아 디미트리 프루벨 작가가 그린 '형제의 키스'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1979년 실제로 나눈 키스 장면을 재현한다. 동독 30주년을 맞아 동독의 건재를 장담하며 나눈 형제애 어린 키스 앞에 작가는 이렇게 썼다.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
형제의 키스처럼 유명한 벽화 앞에서는 사진 찍으려는 이들이 신경전을 벌인다. 수아와 나는 도저히 그 은근히 살벌한 눈치게임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어정쩡한 거리에서 셀카 모드로 벽화를 뒤에 배경처럼 두고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왜곡 때문에 프레임 주변에 걸린 우리 얼굴은 길고 못생기게 늘어지고 말았다.
이 벽화 앞에서 한 친구를 떠올렸다. 같은 학과 동기 중에 이스라엘에서 온 친구가 있다. DAAD 장학생이면서 날 선 태도로 작업하는 그녀는 유대인이지만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으며, 군 복무 시절 내내 심하게 겁에 질렸었고, 독일 내 일상 속에서도 자주 공포를 발견한다. 학교 세미나와 도시 곳곳의 역사를 반성하는 장소에서 피해자로서의 자기네 민족이 여전히 다루어지고 있는 기분은 어떨까. 독일인의 흔한 무심함이 일종의 개인적인 공격처럼 다가올 때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인근 쇼핑몰로 들어갔다. 잇 베를린Eat Berlin은 일종의 음식 편집샵. 베를린 중심에 놓인 베를린 텔레비전 탑을 씹어먹는 킹콩만 한 곰 일러스트레이션이 아주 귀엽다. 개인적으로 독일에서는 디자인에 한 끝 있는(!) 여행 기념품을 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 나눠줄 선물을 사고 싶은 사람은 한 번 들려보길 추천한다. 적당히 '베를린에서 사 왔어'라는 티가 나면서도 세련된 선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음료와 (소시지용) 소스, 티셔츠 등의 브랜드 굿즈를 함께 팔고 있다.
잇 베를린 Eat Berlin
at East Side Mall - EG-W1, Tamara-Danz-Strasse 11 / Warschauer Str. 10243 Berlin
배고파진 우리는 마구마구 걸어 강 건너 내가 아주 좋아하는 버거집에 갔다. 오늘따라 걷는 수아의 지도에 겨우 숟가락 올리듯 추가한 나의 정보. 바로 버거마이스터Burgermeister다! 나는 일 년에 햄버거를 먹는 일이 아주 없다시피 하지만 이곳은 정말 맛있어서 종종 생각날 정도다. 너무 느끼하지 않고, 베지 버거도 준비되어 있으며, 감자튀김은 꼭꼭 시키길 추천하니 참고. 베를린에 총 두 개의 지점이 있는데 가방이 무겁다면 전철역 아래 야외 가판대처럼 생긴 지점보다는 제대로 실내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지점을 추천한다. 사진은 드디어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스카프를 사고 의기양양하게 오물대는 수아.
버거마이스터 Burgermeister
KOTTBUSSER TOR, Skalitzer Straße 136, 10999 Berlin
S
그다음 행선지는 부 스토어Voo Store. 한국인들이 꼭 들리는 공간 중 하나인 듯한데, 웬만한 이들은 그냥 인테리어를 둘러보고 나가게 될 것이다. 고가의 브랜드 편집샵인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흥미로운 곳은 아니라서 공유는 패스. 우리는 금방 가게 문을 나왔다.
기본적으로 목표지를 도착해 사진을 후딱 찍으며 정신없이 이동한 뒤, 사진을 보며 '가봤다'라고 위안 삼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걸으면서 자문해본다. 우리는 '점의 여행'하지 말자. 선의 여행, 면의 여행을 하자. 그런데 면의 여행은 그럼 무엇이지? 그건 계속 어딜 향하긴 하는데 보이는 대로 딴짓하는 여행일 거야.
한국인 집단지성에 기반한 수아의 지도에 추가해보는 현지인 정보 하나. 크로이츠베르그Kreuzberg 인근을 걷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요 건물. 자세히 보면 살구빛 외벽에 무엇인가 입체적으로 쓰여있다. 그냥 지나가기 쉽지만 알고 보면 1994년 터키 여성작가 아이제 에커만Ayse Erkmen의 설치작업 '집 위에Am Haus'다. 이 작품에서 터키어의 특징적인 표현이 이용된다. 터키어 문법에 과거를 표현하기 위한 접미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dis, 하나는 -mis다. 일반적인 회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전자는 직접 보고 들은 경험에 대한 과거형 표현을 만들고, 후자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과거형 표현을 만든다. 이때 건물 위에 얹어진 것은 후자 -mis의 다양한 파생 표현.
1960-70년대 독일의 전후 세계에는 인력난이 있었고 그 시기에 터키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로서 대거 이주했다. 그리고 크로이츠베르그는 바로 베를린의 대표적인 터키인의 밀집 주거지역. 시간이 흐른 만큼 이제는 처음 정착한 터키인들의 다음, 그다음 세대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예상 가능하게 젊은 세대들은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탓에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다. 독일 내 가장 큰 이주민 비율을 자랑하는 터키 공동체. 그리고 그 내부의 세대교체와 각 세대의 자기 정체성 및 독일에 대한 인식 사이의 간극들. 작가는 작품 안에서 터키어의 특수한 문법을 통해 이러한 사회 현상들을 시적으로 지시한다.
걷고 걸어 벼르던 카페 '아라비카 커피'에 들렀고 한국인, 중국인 비율이 너무 높아서 놀랐다. 슬슬 해는 저물어가고 플릭스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토포 그래피 오브 테러Topography of Terror'와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Denkmals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을 아주 빠르게 보았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보기엔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아주 길고 장대한 장소들이니,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영어 읽기에 문제가 없다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길 추천한다.
수아는 결국 대표적인 명소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간신히, 겨우 1-2분 있었을까, 얼른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떠야 했다. 기어이 택시를 잡으러 뛰어가는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디자인이 돋보이는 세련된 장소들과 역사적 관광지를 섞어서 재미있게 다니긴 했는데, 어쩐지 수아가 베를린의 유명하다는 주요 관광지를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못 본 느낌이라 내가 다 아쉽다고.
하지만 그 균형이 대체 무엇일까. 그런 게 애초에 있기나 한가. 여행 가이드와 네이버 블로그 따위를 자꾸 들여다보면 이것도 가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중요해 보이고 하지만, 엄연히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은 언제나 스스로가 결정하면 될일 이다. 주요 명소를 다 본다고 도시를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다고 그 도시의 독특함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욕심을 버린 채 열심히 관찰하는 눈 만이 내 경험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가이드다. 어차피, 언제나 도시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 그 이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