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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ul 14. 2019

크고 작은 하루 8일째, 마음대로 잘 안돼

이 친구가 와있는 동안 내가 조금 더 한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수아가 오고 난 후 줄곧 드는 생각이었다. 논문학기가 수업은 없지만 대단히 바쁘다는 걸 뒤늦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오전에는 Stefan의 논문 프로젝트를 위한 참가자 인터뷰와 대빵 교수(?) Danica와의 면담이 잡혀있었고 특히 후자를 위해 새벽 내내 영상편집을 해야 했다. 간신히 마감을 한 당일 아침, 갑자기 교수가 면담을 취소해버렸지만. 후후... 하하하... 물리적으로 바쁘기도 하지만 괜스레 마음이 계속 불안하고 번잡하다. 마음이 이렇게 어지럽다 보니 또 괜히 아침에 원격 미팅을 하고 있는 수아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불평마저 들기 시작했다.


[수아]: 아람 토스카 카드 가지고 나왔지...?
불안해서 한번 더 물어본다
오전 10:15


내가 먼저 밖에 나와 분주한 아침을 보내는 동안, 수아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짬이 나서 장을 보러 밖으로 나왔다. 튀링겐 Thueringen 주의 학생은 토스카 Thoska 카드라는 학생증을 발급받는데, 학교 건물 출입증, 대중교통카드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때 내가 사는 기숙사는 더욱이 이 카드가 방 키를 대신하기 때문에, 카드를 방 안에 놓고 잠그거나 하면 기숙사 관리자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아저씨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근무를 안 하시는 게 큰 함정. 그래서 수아와 내가 외출시간이 다르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수아]: 집에 두유가 남았었나?
일단 사가요~
오전 11:08


짜증은 짜증대로 나면서도, 친구를 여기 멀리까지 초대해놓고 혼자 장을 보게 한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아는 레베 REWE에서 이것저것 먹거리를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능한 우유 소비량을 줄이려는 주의여서 시리얼을 두유에 말아먹는다. 생각으로는 서울살이, 직장생활 콤보에 지친 수아를 편안하게만 해주고 싶은데. 내 몸은 자질구레한 학교일을 처리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 멘자 Mensa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그늘이 잔뜩 진 나의 우려와는 달리, 다시 만난 수아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동글동글 초코볼 시리얼 옆에 나란히 들고 있던 튤립 다발을 건네면서, "아람 주려고 샀어!"라고 화사하게 웃었다. 다시 보니 옆구리에 멘 가방들은 터질 듯 뚱뚱했다. 수아 왈 레베에서 식료품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서 한참 서성이다가 궁금한 것을 하나씩 사다 보니 폭주해버렸다고. 내가 손님을 잘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각종 스트레스가 휘몰아치는 지금 나름대로 혼자만의 모험을 즐기고 있는 수아를 보니 다행이었다. 고마웠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는 평소에 멘자를 자주 찾지 않는 편이다. 바우하우스 우니 멘자는 다른 대학교 것에 비해 작은 편인데, 그나마 파스타 샐러드바를 애용한다. 원래 파스타와 샐러드를 따로 받아야 하지만 한 독일인 친구가 마이웨이로 한 그릇에 섞어 담는 것을 보고 줄곧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다. 토스카 카드로 학생요금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성의 없게 받으면 2유로, 거나하게 받아도 4유로를 넘지 않는다. 파스타 샐러드 외 다른 바에서는 슈니쩰, 굴라쉬와 감자를 제하면 다소 괴랄한 음식이 나올 때가 많다. 멘자에서 어떤 음식이 나오는지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요 인스타를 구경해보시라.



밥을 다 먹으면 커피를 마셔야지. 멘자 맞은편에는 바우하우스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엠악쩬 M18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뒷마당에 앉았다. 오래간만에 밖으로 빠져나온 수아는 말을 이어나가면서도 중간중간 조용히 사진을 찍었다. 장을 보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메고 길을 걷고, 저렴한 학식을 먹고, 식후 커피를 때리는, 어쩌면 서울에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일상.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만이 시각을 새롭게 해주는 것일지 모르겠다. 볕을 쪼면서, 설탕의 무게에 카푸치노 거품이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처량...





6월 초까지 내가 논문을 쓰는 과정을 지도해주는 어드바이저가 세명이 있다. 헌데 나는 어디서부터 얼마큼 의견을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드릴 질문을 도출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과정 자체가 대단히 추가적인 노동으로 느껴진다. 결국 가장 처음 함께 논의한 이후, 혼자 논문을 읽어대고 관련 아티클을 확인하면서 내게 필요한 레퍼런스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나가는 중. 외롭기도 하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오후에는 6월 초에 있을 퍼포먼스 작업을 함께 구상하는 친구들과 미팅이 있어서 잠시 또 학교 스튜디오에 갔다. 학교 커리큘럼이 꼬여서 논문과는 별도의 작업을 또 하고 있다. 한국, 인도, 이란, 콜롬비아, 칠레 - 다른 국가에서 온 친구들끼리 마음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생각하는 방식도 속도도 달라서 최근에 투닥거리는 일이 많다. 한 친구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나머지 친구들이 이 친굴 귀찮아하기 시작하고 모든 결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배제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나는 너무 마음이 쓰여서 힘들다.


굳이 그늘에 앉아있는 수아


미팅을 마치고 빌란드플랏쯔 Wieland platz에서 수아를 다시 만났다. 토스카 카드 때문에 수아는 먼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바이마르는 워낙 작은 동네여서 와이파이가 잘 터지고 일이나 공부를 하면서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가 없다시피 하다. 여기서 카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대화를 마치면 일어나 줘야지, 죽치고 일하는 문화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아는 길에서 카레 부어스트와 맥주를 사다가 먹으며 일하려고 했는데, 오프너가 없는 바람에 맥주는 한 모금도 맛보지 못하고 짜디짠 소시지만 몇 개 집어 먹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 수아는 셔츠가 참 잘 어울린다

저녁이 되자 개별적인 상황들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나를 위해 수아는 가지 볶음을 해주겠다고 했다. 다년간 자취생활을 한 수아 덕에 밥반찬 리스트가 추가되고 있다. 수아가 오면 여유가 넘치는 독일 생활을 꼭 보여주어야지 생각했었는데, 내게 이곳은 여전히 분투가 진행되고 있는 전쟁터여서, 외려 수아가 지원군으로서 자주 나를 구해주고 있다.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어쩌면 재고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중고물품점에서 사 온 프라이팬은 잘 못 골랐는지 자꾸만 재료를 태우며 말썽을 부렸다. 내 그릇이 아직 이렇게 작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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