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한국에서 독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채 안됐다. 시차 적응도 안됐고 아직 가까운 친구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학과와 동네서 벌어지는 일들도 채 따라잡지 못했다. 한 달여 동안 방을 세 놓았었는데 이불빨래도 못했네 참.
마지막 논문 학기다 보니까 마음이 늘 부산스럽다. 논문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여름에 있을 졸업 이후에 나는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아주 많다. 내가 다니는 바우하우스 대학교Bauhaus Universitaet Weimar는 올해 특별히 10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요란하게 온갖 행사와 활동으로 그 역사적 명성을 다시 호령하고 확장하는 데에 열심이다. 그 과정에서 재학생과 졸업생 모두가 마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현대의 바우하우스 구성원으로서 자기 작업을 어떤 식으로든 돋보이게 만들려 노력(하거나 동원당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하던 미술을 관두고 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이 들뜬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잘 찾지 못하고 있다. 휴, 그냥 그런 상황이라고. 1920-30년대 바우하우스에도 나같이 방황하는 회의론자 학생이 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온갖 멋지고 쿨하고 힙한 것들을 많이 보지만, 동시에 나는 자꾸만 그 안에서 질식할 것 같다. 방향을 잃어서 그런 것 같은데, 수년간 그것은 잘 해결되지 않고 있다. 조금 더 실용적인 목표가 분명한 일, 타깃이 정확한 일을 하고 싶다. 어떤 사회나 조직 내에서 기능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 같다.
늘 멀찍이 궁금해하던 인테리어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일로써 배워볼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난 학교는 지겨워서 못 다니겠어 더는... 학교 체계 안에서 사실 실제로 의미 있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 학생 노릇해봤음 알잖아. 흠, 하지만 독일 Hochshule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해. 너희 동네 community college 중에도 인테리어 분야에 닿는 괜찮은 수업 있을 거라고? 미국인데 수업료 비싸지 않을까? 한 달 반 만에 만난 아샤Asha와 매일 바뀌는 미래에 대한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었다. 새로 문을 연 Neue Bauhaus Museum에서 강연이 있다고 해서 들으러 가려했는데 우리끼리 근황을 얘기하다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집에서 종일 일하던 수아는 저녁 시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보리 원피스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온갖 예쁨을 무장해 나왔건만 오늘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말썽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Gasthof Luise’s에 가서 드디어 첫 독일식 식사를 했다. 굴라쉬Gulasch와 으깬 감자를 곁들인 튀링겐 지역 특산 소세지Thüringer Bratburst mit Katoffelpüree을 시켰다. 학생식당에서 매일 볼 수 있는 흔한 메뉴이지만 이렇게 레스토랑에서 시키면 좀 더 정교한 맛으로 만날 수 있다.
고된 정신활동을 마치고 나온 수아에게 내 칙칙한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바이마르산 맥주를 가득 담은 잔을 부딪치며 오늘 일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무거운 맥주잔의 경쾌한 소리는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