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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Apr 12. 2019

크고 작은 하루 2일째, 무거운 맥주잔


사실 나도 한국에서 독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채 안됐다. 시차 적응도 안됐고 아직 가까운 친구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학과와 동네서 벌어지는 일들도 채 따라잡지 못했다. 한 달여 동안 방을 세 놓았었는데 이불빨래도 못했네 참.


수아의 동물친구들 2/3. 저 토끼는 우리보다도 나이가 많다고 했다.


마지막 논문 학기다 보니까 마음이 늘 부산스럽다. 논문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여름에 있을 졸업 이후에 나는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아주 많다. 내가 다니는 바우하우스 대학교Bauhaus Universitaet Weimar는 올해 특별히 10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요란하게 온갖 행사와 활동으로 그 역사적 명성을 다시 호령하고 확장하는 데에 열심이다. 그 과정에서 재학생과 졸업생 모두가 마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현대의 바우하우스 구성원으로서 자기 작업을 어떤 식으로든 돋보이게 만들려 노력(하거나 동원당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하던 미술을 관두고 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이 들뜬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잘 찾지 못하고 있다. 휴, 그냥 그런 상황이라고. 1920-30년대 바우하우스에도 나같이 방황하는 회의론자 학생이 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누가 이사가는 날은 길거리에 중고물품 대잔치가 열린다. 이날은 특히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의자들이 여러개 눈에 띄었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온갖 멋지고 쿨하고 힙한 것들을 많이 보지만, 동시에 나는 자꾸만 그 안에서 질식할 것 같다. 방향을 잃어서 그런 것 같은데, 수년간 그것은 잘 해결되지 않고 있다. 조금 더 실용적인 목표가 분명한 일, 타깃이 정확한 일을 하고 싶다. 어떤 사회나 조직 내에서 기능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 같다.


늘 멀찍이 궁금해하던 인테리어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일로써 배워볼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난 학교는 지겨워서 못 다니겠어 더는... 학교 체계 안에서 사실 실제로 의미 있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 학생 노릇해봤음 알잖아. 흠, 하지만 독일 Hochshule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해. 너희 동네 community college 중에도 인테리어 분야에 닿는 괜찮은 수업 있을 거라고? 미국인데 수업료 비싸지 않을까? 한 달 반 만에 만난 아샤Asha와 매일 바뀌는 미래에 대한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었다. 새로 문을 연 Neue Bauhaus Museum에서 강연이 있다고 해서 들으러 가려했는데 우리끼리 근황을 얘기하다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Neue Bauhaus Museum 안에서 Michael이 사진을 보내왔다.


집에서 종일 일하던 수아는 저녁 시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보리 원피스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온갖 예쁨을 무장해 나왔건만 오늘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말썽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Gasthof Luise’s에 가서 드디어 첫 독일식 식사를 했다. 굴라쉬Gulasch와 으깬 감자를 곁들인 튀링겐 지역 특산 소세지Thüringer Bratburst mit Katoffelpüree을 시켰다. 학생식당에서 매일 볼 수 있는 흔한 메뉴이지만 이렇게 레스토랑에서 시키면 좀 더 정교한 맛으로 만날 수 있다.



고된 정신활동을 마치고 나온 수아에게 내 칙칙한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바이마르산 맥주를 가득 담은 잔을 부딪치며 오늘 일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무거운 맥주잔의 경쾌한 소리는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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