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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Apr 18. 2019

크고 작은 하루 4일째, 시린 베를린으로

수아는 인스타그램 헤비유저다. 뭐 나도 하루에 인스타그램 보는 시간을 따지자면 결코 적지 않지만, 그는 업로드를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나와는 다르다. 내가 팔로우하는 수아의 계정만 세 개인데 아직도 내가 찾아내지 못한 비밀 계정이 있다고 했다. 까도 까도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양파 같은 여성. 인스타그램으로 보이는 그는 기본적으로 방방곡곡 서울과 지방, 동아시아 도시를 엄청나게 쏘다니고, 낮에는 근사한 카페와 문화공간을 다니다 밤에는 분위기 있는 바에서 생맥주나 칵테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어떻게 그렇게나 돌아다니는지 신기할 따름인데, 이번에 함께 지내게 되면서 본 수아는 꼭 그렇지 만도 않다.


동틀 때부터 일하는 두 사람

오늘도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누워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읽다가 6시 근처에 일어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커피 마실래요?"라고 물으며 모카포트에 원두를 담는다. 둘 다 커피가 내려지면 눈곱만 떼고 당장 업무를 시작하는 편이다. 나는 돌보아야 할 일이 많은데 워낙 너무 모든 것에 진지하고 심각한 타입이라 다수의 일이 다 함께 늦어져서... 그렇게 고통받는 생을 살아가는 중이어서 그렇고, 수아는 여기에서 명백히 장거리 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혜화동에서 키보드를 두닥이고 있는 동료들과 일정 시간 동시간대에 업무를 보아야 하기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실은 이날 오전은 나에게 좀 특별했다. 친한 오빠들과 거의 오륙 개월간 작업해왔던 움직이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세트를 드디어 제출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오빠들이 주로 기획을 맡고 나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그리는 식으로 협업을 진행했다. 넷이서 서울, LA, 바이마르에 각각 떨어져 있고 각자 생업(?)들이 있다 보니 과정이 많이 늘어지긴 했지만 이렇게 완주하다니 기쁘고 고맙다. 수아는 내가 '제출'버튼을 누르는 긴장과 희열의 순간을 옆에서 영상으로 남겨주었다. 너무 광란의 순간이라 이미지는 생략하겠어. 우리는 심사 후 한 달 내로 이 이모티콘을 출시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결과를 받아보게 된다.


'공부하는 빨간팬더 다다'. 잘 부탁드립니다요


아무튼, 둘 다 일하느라 결국 밀려 밀려 버스 예약은 아침에, 가방은 출발 전 십 분 만에 쌌다. 바이마르역 앞에서 플릭스버스Flixbus를 타고 베를린을 향했다. 수아는 근무시간에 이동하게 된 셈이라 차 안에서도 대단한 활자 노동을 이어갔다. 이것이 힙한 곳 어디에나 존재하는 듯한 수아의 실제 삶이다. 각 잡고 일할 장소가 갖추어져야만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나와 달리, 몸뚱이가 어디에 있든 노트북만 있으면 자기 일에 온전히 집중해내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기동력과 집중력을 둘 다 갖춘 사람이니 이 시대에 성공할 거야. 참고로 독일 고속도로에서는 보통 안정적인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지 않다. 플릭스버스에서 와이파이가 잡히긴 하지만 사실 신호가 영 불안정할 때가 잦다. 


열심히 일한 자와 파워 멀미


집중력이 암만 좋아도 멀미는 피하기 쉽지 않다. 바이마르에서 베를린까지 버스로 약 4시간이 걸리는데, 글을 읽고 쓰고 편집하는 과정이 정확성을 요하는 작업인 만큼 수아는 결국 얼마 못가 엄청난 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리고 나서도 한동안 울렁대는 속. 저녁시간이 다가오는데 도저히 학센이니 슈니첼이니 기름진 독일 음식은 먹지 못하겠어서 베를린 중앙 버스터미널(ZOB)에 20분 거리에 있는 한식집 한옥Hanok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내가 베를린에서 가장 추천하는 한식집이다. 보통 유럽에서 만나는 한식 레스토랑은 내가 시킨 음식만 덜렁 나오는 반면에 이곳은 흑미밥에 서너 가지 기본 찬거리를 내오고 식후 음료로 수정과도 준다. 저렴한 점심메뉴도 있으니 ZOB 근처에서 먹을 것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추천한다.

한옥Hanok, Kurfürstendamm 134, 10711 Berlin


여행을 좋아하는 한 친구가, 내가 독일에서 산지 일 년 반이 되도록 '독일식 족발'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를 안 먹어보았다고 하니 잔뜩 충격을 받고 수아에게 꼭 베를린에 가면 아람을 부추겨 학세를 먹으라고 부탁해놓았다는데. 이대로라면 이번에도 어렵지 않을까 어험..



개인적으로 베를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 베를린에 간 것은 첫 학기 학과 프로젝트 때문이었는데, 그때 호스텔에서의 춥고 고단한 집단생활(?)이 너무 뇌리에 박힌 것일까. 역사를 반성하는 장소들이 곳곳에 있으면서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생동하는 베를린은 분명 매력적인 도시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충분히 '안전'하지 않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이게 그냥 대도시의 일반적인 특징에서 나오는 불평인 것인지, 아님 정말 베를린의 무엇이 걸리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배가 똥그래지도록 밥을 옴팡지게 먹고 예약해둔 숙소를 향했다. 중앙 정원을 향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의 터키식 건축물 3층에 있는 에어비엔비. 여행 때 에어비앤비를 애용하는 편인데 호스트들은 몇 가지 종류로 갈리는 것 같다. 열과 성을 다해 집을 가꾸고 극진히 게스트들을 챙겨주며 시간 들여 대화를 나누는 호스트, 성격상 별로 원하지는 않지만 추가 수익을 위해 게스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호스트, 오직 수익성 사업으로서 에어비앤비를 활용하는 호스트. 이번에 간 에어비앤비는 그중 두 번째인 것 같았다. 집도 예쁘고 이곳에 실제로 사는 것 같긴 한데 게스트와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 웹상으로 친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실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느낌. 분명 아주 모르는 누군가가 집에 온다는 것은 작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 거다.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만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일 거다.


감기는 눈을 비비며 숙소 앞에 있는 라이브 재즈바 Yorkschloechen에 갔다. 1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1970년대부터 인근 아티스트들의 집결지로 자리매김을 해왔다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무대가 있고, 어디에 앉든 언제 도착하든 공연 중이면 6유로를 내야 하니 가능하면 제때 와서 무대 앞 테이블을 차지하길 추천한다. 모르는 사람들과 테이블을 함께 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니 딱히 자리가 안 보이면 남는 자리 어디든 앉아도 된다. 우리가 간 날은 피아노 1, 트럼펫 1, 보컬 1의 조합으로 제법 발랄한 재즈를 들을 수 있었다. 특선 맥주는 별 2개 드립니다. 낮 시간에는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모양이다.


야호~

일요일에서 목요일 사이 일하는 수아는 내일하고 모레, 독일에서 첫 주말을 가진다. 전날 재빠른 리서치 실력으로 베를린 맛집 멋집을 섭렵해 여행 지도를 완성한 그녀가 이틀간 다니게 될 베를린은 어떤 곳일까. 나의 베를린과는 얼마나 다를까. 어렵게 온 독일을 바쁘게 구경해야만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 탓에 여행자도 어쩌면 직장인만큼이나 높은 압력을 견디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은 오늘도 처음 왔던 때처럼 너무 추웠다. 부디 너무 어렵지 않은, 제법 괜찮은 시간으로 기억되는 나날 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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