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아쉬울 게 없어 보인다고, 타인의 눈에는 쉽게 그리 비칠 만한 사람은 스스로 죽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보였던 그녀의 쌍둥이 언니는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안진진의 어머니에게 삶이란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만 '이제 그만 끝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양귀자 <모순> 15쪽, 쓰다
1. 사람은 언제 죽음을 떠올리는가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153쪽)
소설 <모순>의 화자인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는 일란성쌍둥이 - 쌍둥이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 인데, 두 사람의 삶은 결혼 이후로 극명하게 달라진다. 외모도 목소리도 성격도 비슷했던 두 사람의 이런 삶을 두고 '모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머니는 결혼 이후로 술꾼인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며 크고 작은 사고 - 소소한 가출에서 살인미수와 징역에 이르기까지 - 를 일삼는 두 자녀를 홀로 길러내야 했다. 반면에 이모는 가정적이고 성실한 남편을 만났고 두 자녀는 유학을 보내는 등 쉽게 불만 하나 표현해서는 안될 듯한 평온한 환경에서 삶을 살아간다. 두 사람은 같은 외모였지만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이모보다 열 살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가장 모순적인 것은 일란성쌍둥이의 삶이 그토록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쉬 행복하다고 판단할 법한 이모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다시 태어나면서' 굳세게 삶을 살아간다. 드러나는 모습으로 쉽게 판단하기에는,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앞으로도 남은 삶 또한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끝냈다. 반대로 삶의 어느 순간에도 평온한 행복이라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던, 남은 삶도 중풍과 치매를 앓는 남편과 감옥에 간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사람은 - 적어도 이야기의 말미까지는 -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안진진의 어머니에게 삶이란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만 '이제 그만 끝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연착 한 번 하지 않는 기차에 비유되는 성실한 이모부는, 자신의 삶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다. 오로지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떠나기로 되어 있는 본인의 계획표대로 삶을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가 절실하게 아내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역할이 자신의 계획표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을 떠난 이모의 자식들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기로 했다. 아들과 딸은 각자 너무 훌륭하게 자라서 엄마의 손길 없이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게 됐으니까.
이것이 사실과 얼마나 다를지 몰라도 한 겨울 내리던 첫눈을 오랫동안 홀로 바라본 후, 넓지만 텅 비어 있는 집으로 돌아온 이모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반면에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엄마를, 그리고 아내를 필요로 하는 아들과 남편이 있다. 그것이 비록 옥바라지와 병간호일지라도. 이모는 그런 전쟁 같은 삶이 무덤 같은 평온 속에서 사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그저 죽을 수 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64쪽)
2. 우리는 가끔씩 비극을 선택한다. 그것이 비극인 줄 알면서도
안진진은 '나영규'와 '김장우' 두 남자 중 한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다. 나영규는 뚜렷하게 세워둔 '인생의 계획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며 사랑 또한 그 계획표의 일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남자다. 반면에 김장우는 사랑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가득하면 그때서야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다.
"좋지요? 이 집을 선택한 것은 경치도 경치지만 '그날 오후'라는 찻집 이름이 짱이었어요. 먼 훗날, 진진 씨와 내가 앉아서 그날 오후, 우리가 그곳에서 차를 마셨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를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75쪽)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102쪽)
<모순>에 존재하는 또 다른 커다란 모순은 안진진이 이모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삶을 착실히 계획하는 나영규가 아니라, 돈과 계획 대신 일종의 '낭만'을 지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스스로 '사랑'이라고 정의한 김장우를 선택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모의 죽음을 마주한 후 이모부와 꼭 닮은 나영규와 결혼하기로 결심을 바꾼다. 이모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안진진은 김장우와 결혼했을 것이다.
어째서 이모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녀와 유사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것도 스스로 사랑이라고 규정한 대상과 이별을 불사하기까지 하면서.
내가 가진 가치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결정에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으나, 그 선택자체는 유별난 것으로 볼 정도까지는 아니란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모순적이라 하는 이유는 결심을 바꾸게 한 계기가 이모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안진진은 심플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 '나는 이모와 다르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안진진의 고민은 엄마와 이모, 정반대의 삶을 산 쌍둥이 자매 중 누구를 닮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절반쯤은, 혹은 그 이상으로 '아버지의 삶'과 '이모의 삶' 사이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진진이 처음으로 블랙아웃을 경험할 만큼 만신창이로 취했던 밤 - 그러니까, '아버지의 모습처럼'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녀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깨닫는다. 술과 폭력과 부랑을 일삼았던 아버지는 무엇보다 엄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그 모습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못되게 구는, 어딘가 손쓸 수 없이 고장 나버린 인간이 보여주는 '모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낯설고 어려워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엄마도 이모도 아버지도 아니다. 누군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고 해서 같은 삶을 살게 되리란 법은 없다. 다만 그녀는 부모의 삶은, 가난과 폭력과 불행과 방황과 어린 날의 부끄러움으로 표현해야 할 그 삶들은 자식으로서, 그리고 본인이 이어받은 기질로써 어쩌면 충분할 만큼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모의 평온한 삶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고, 김장우를 선택한다면 그 '심심한 무덤'에 이르기는 더 요원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했다'라고 안진진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본인이 그토록 좋아했던 이모의 삶을 안진진은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따듯하고 다정했으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순수함을 잃지 않은 이모의 마지막이 왜 그래야 했는지 직접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
"해 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두운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