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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되지 못한 감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나

감정을 버렸던 그날, 나도 함께 사라졌다

by 안유선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당신이 ‘그 감정’을 몸에서 떼어낼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불길,
분노라는 이름의 파도는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고도 남는다.

그 감정이 너무 크고, 너무 날카로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을 몸에서 분리해 버리는 선택을 한다.


‘이건 나 아니야.’라고 믿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JTBC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 11화에는
바로 그런 감정의 분리가 인격을 이룬 이야기가 등장한다.
솜이(한지민 분)는 처음엔 해숙(김혜자 분)의 연적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솜이는 해숙이 오래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고통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감정체’,
즉 몸이 견디지 못해 분리시킨 감정 그 자체였음이 드러난다.


베이지 감성적인 찢어진 종이 공지사항 휴무안내 인스타그램 포스트 (12).png

감정이 몸에 담기지 못하면 그 감정은 의식에서 떨어져 나와 마치 또 다른 존재처럼 머문다.
그 감정과 연결된 기억도 함께 희미해진다.
기억은 있지만 감정이 없거나,

감정은 있는데 기억이 없다.
심지어 이유 없는 통증이나,
해명할 수 없는 공허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과거는 이렇게 유령이 된다.


우리가 겪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과거’가 되기 위해선
몸과 마음의 통로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비극은,
때로는 그 감정이 너무 커서
혼자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는 것이고,
몸이 포기한 감정은 기억이라는 언어를 잃고 맴돌고 떠도는 그림자로 남는다.


드라마 속 해숙은,
사랑하는 이들의 도움 속에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고 감정을 다시 품어낸다.
그 순간, 솜이는 소멸한다.

감정이 몸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으면
분리되었던 마음은 제 자리를 찾는다.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
밀어낸 기억, 억눌러진 감정.
고통에 익사당하지 않으려고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감정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혼령처럼, 그림자처럼 삶의 한켠을 떠돈다.

결국, 그 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길은

그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서는 어렵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가능한 길이 있다.

그 손은,
감정을 받아낼 그릇이 되어주고,
나 대신 울어줄 귀가 되어주며,
나와 함께 통과해 줄 따뜻한 체온이 된다.


자신을 떠나야만 했던 감정을
다시 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한복판에서 벗어나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을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치유의 감각』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감정을 따라,

감정과 함께 춤추는 감각을 따라,

당신이 가진 고유의 회복력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안유선 작가 : https://www.instagram.com/yoosun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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