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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Aug 05. 2021

죽음을 보는 재능

M.J. 알리지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고 책을 그냥 패대기쳐버렸다.


뭔가 불쾌한 감정이 온몸에 스멀스멀하게 기어 다니면서 짜증과 화를 유발했다. 이 작품은 나의 세계관과 결이 맞지 않는 소설이다. 난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가의 원래 세계관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서 그가 어떤 느낌을 독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고로 이 작품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평가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지금부터 쓰는 글은 그냥 나 자신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완전한 허구이다.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특정한 감정과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해주지만 그 전해주고자 하는 감정은 읽는 독자 개개의 성향과 만나서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책임까지 작가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왜 이렇게 감정이 상해버린 것인지를 곰곰이 고찰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에는 나에 관한 관찰일지이다.


(지금 이후부터는 소설의 스포일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이 소설을 어떤 장르의 소설로 분류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미스터리? 추리? 죽음을 보는 소녀라는 설정과 그냥 정신 나간 살인마의 범죄가 소설의 큰 두 축이 되는 가운데 지극히 현실적인 살인과 비현실적인 죽음을 본다는 설정이 부딪히는 부분에서 모든 갈등이 파생되고 나중에는 오직 작가의 관점에서만 뭔가 구원적인 결말이 쓰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을 골랐다가 읽은 후에는 큰 감정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생각할 주제가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기이하게 기분이 좋지 않은 특이한 작품을 읽어버렸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다른 소설도 한 편 읽었는데 그것은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소설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끌고 와서 소설가와 그 소설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품 상의 소설가의 이야기와 갈등을 다룬 작품이기에 소설가가 작품에 어떤 것을 투사하고 또 소설가는 어디까지 창작의 영역에서 작품의 인물들을 다룰 수 있는가를 고찰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을 읽은 후의 뒷맛이 더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다고 일단은 생각해 본다.


기욤의 소설을 읽은 이후 이 작품을 보면 이 소설을 쓴 소설가의 세계관은 너무 난폭해 보이면서 한없이 우울하다. 이 소설은 적어도 ‘선, 악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쓰인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제로 ‘악’과는 거리가 멀고 실존하는 ‘악인’은 오직 살인마 한 명뿐이다. 왜곡된 인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편향된 인식을 가진 살인 중독자이고 남을 해치는 것에서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정신병자에 가까운 범죄자는 그로 인해 자기 파멸적인 행보를 멈추지 못한다. 그의 파멸은 예정된 수순이고 범죄자 자신도 자신의 행보가 계속될 경우 잡히게 될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지만 살인 자체에 중독된 범죄자는 적당한 수준에서 자신의 행동을 멈출 수가 없고 결국 최후에는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즉 살인마의 범죄와 파멸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흥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플롯이다. 죽음을 보는 재능. a Gift for Dying.


이것은 이 소설의 ‘신’인 작가에 의해 주인공 케이시에게 주어진 재능이라고 불리는 저주이다. 소녀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본다. 상대의 눈을 통해서 그 상대의 죽음을 보고 심지어는 타인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본 사실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가 없는 그냥 볼 수만 있는 재능이라는 설정이다.


케이시는 이 재능으로 인해서 그녀의 삶 내내 고통받고 죽는 순간까지 보통사람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이 재능이 그녀 하나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녀 주위의 모두와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그 갈등이 등장인물들을 피할 수 없는 파멸로 몰고 간다는 부분이다.


이 재능은 소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현실의 누구도 이 같은 재능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모두 같은 상황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의 재능을 믿을 수 없고, 그녀를 돕고자 하는 정신과 의사 애덤, 살해당하는 모든 피해자, 그리고 나름 유능할 수 있는 경찰 역시 그녀의 그런 능력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이 이야기에서는 소설적 설정으로 제시된 그 재능이 제대로 활용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설적 장치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현실과 너무나 같은 배경에서 갈등은 소설적 설정에 의해 발생하는데 그 갈등을 해소할 어떠한 장치도 준비하지 않고 등장인물 전체를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가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결말을 그냥 덤덤히 서술하는 식의 마무리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케이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현실의 피해자를 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휘해보려고 하지만 매번 범죄자의 뒤꽁무니만 쫓게 되고 범죄를 막아내는 데는 실패한다. 미성년인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녀는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흐름 상의 분위기로 계속 암시하고 있다. 정해진 운명은 벗어날 수 없다는 고대의 비극 ‘오이디푸스의 왕’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주인공이 오만하게 행사한 자기 정의의 대가를 주인공이 치르는 구조이지만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런 것도 없다. 어떠한 선택을 해도 결과는 비극이고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주인공이 몸부림침으로써 파생되는 모든 일들이 오히려 주인공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을 예정된 비극 속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인다.


주인공과 같이 파멸되어가는 애덤을 보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인물이다. 그런데 케이시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아이와 조우하면서 그 아이가 가진 능력으로 인해 자신이 지켜야 할 본분을 자꾸 어기게 된다. 그것은 결국 케이시의 특수한 능력이 일반의 사례와 맞지 않아서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애덤의 딜레마인 것인데 문제는 그로 인해 애덤이 계속 더 나쁜 상황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즉 애덤은 현실적 의료인으로서 행동해도 도덕적 양심에 의해 상처 받게 되고, 케이시를 전적으로 믿는 보호자로 행동해도 비현실적인 능력을 믿는 무능력한 의료인이 되어버리는 소설적 딜레마에 빠지는 것인데 그것을 해소시켜줄 어떠한 해법도 작가는 제시하지 않는다.


소설은 결국 종말에 가서 살인마에 붙잡힌 케이시를 애덤이 총으로 쏘아 범죄자와 케이시 모두를 죽이는 것으로 맺음 하게 된다. 소설의 초반에 케이시가 자신의 능력으로 예언한 대로 케이시는 애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것은 살인마를 놓치지 않기 위한 케이시의 숭고하고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 작가가 서술하는 이야기의 흐름이다. 애덤은 결과적으로 두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고 이제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일찍 죽는 운명보다 더 나쁜 운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삶이었다.’라고 작가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폭력이다.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에서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인물에게 강압적으로 강요한 설정이 어떻게 ‘삶이었다.’라는 거창한 문구로 맺음 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케이시와 같은 능력을 보유한 그녀의 외할머니가 케이시의 죽음을 인지하면서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죽은 케이시를 생각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끝이 난다.


‘고통에 시달리던 아름다운 영혼이 떠났다. 비슬라바는 머잖아 케이시와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그저 황금빛 호수, 행복하고 자유로운 새들을 지켜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던 비슬라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사랑하는 케이시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나는 소설의 마무리 부분을 계속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이 분노가 아마 결정론을 신봉하는 특정 종교에 대한 반감과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중이다. 작가는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신을 흉내 내어 이 모든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국 자유를 얻었다고 그녀를 알고 있는 한 인물의 생각을 빌어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나는 그 태도가 너무 싫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다 그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취향과 기호에 너무나 맞지 않는 저 해석이 그냥 나를 화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작품으로 풀어낼 권리가 있고 그것이 특정의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도 잘못된 행동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이제 내가 싫은 부분을 조금 더 깊이 파헤쳐 보자.


나는 주인공 케이시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택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생은 원래 부조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에 드는 최선의 선택이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차악’과 ‘최악’ 중에 차악을 선택하고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심지어는 신념과 양심에 의해 자신에게는 해가 될 수 있는 ‘최악’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결과를 자기 결정권에 대한 비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케이시는 미성년이고 그 자체로 삶에 미숙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녀가 자신의 능력은 단지 죽음을 보는 것뿐이고 그 능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계속 체험하게 되면서도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자기 양심에 대한 보호작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이미 예정된 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보고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고통이지만 그 고통도 자기 죽음의 예지에서 비롯되는 공포에는 미치지 못하기에 소녀는 계속 예정된 죽음을 막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작가는 어린 소녀의 그 모든 노력을 외면하고 정해진 운명으로 소녀를 끌고 가서 최종적으로 살인마의 손에 소녀가 난도질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예정된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죽음을 보는 상황을 받이들이고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어린 소녀는 이제 살인마의 눈에서 자신과 살인마가 애덤에 의해 동시에 죽게 되는 종말을 읽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소녀는 이 고통이 어떻게 종료되는지를 알게 됨과 동시에 죽음 자체를 이제는 갈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살인마의 잔인한 고문에 의한 고통보다는 살인마를 처단하는 자신의 죽음이 이제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고난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숭고한 어떤 사명을 달성하고 소녀가 마침내 소망하던 자유를 얻은 것처럼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을 거창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소녀는 그냥  극악한 공포에서 계속 도망치는 삶을 시종일관 강요받았다 그리고  강요에 따라서 예정결과를 계속 수용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 소녀는 작가의 의도에서 조금도 벗어날  없는 너무나 연약하기만  피조물이었다. 그녀는  번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녀 자신의 삶에 주인이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 화가 난다. 선택지가 만족스럽지 못할 수는 있더라도 인생의 갈림길이 펼쳐지는 선택의 순간에는 외부의 어떤 개입도 있어서는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는 너무 많이 개입하고 있고 그래서 그 결과가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서 작가가 완벽한 인격자인 것은 아니다.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쓴다고 해서 그 작가가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이 어떤 의도로 쓰인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잘 쓰인 작품인지 아닌지도 평가하기가 애매하다. 단지 이 작품은 최근에 본 어떤 작품보다 내 내면을 긁어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인생은 소설이다.’라는 기욤 뮈소의 작품보다 더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마 기욤의 작품보다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회자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히 나에게는 나쁜 쪽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기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감상을 일단 이렇게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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