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쌓기
나는 무엇을 쌓기 위해서는 항상 단단한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새롭게 쌓아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한 이후에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학문의 바탕으로 하였듯이 나도 무언가 단단한 기반 위에 나의 삶을 쌓아 올려야 그것이 흔들리지 않고 잘 유지가 될 것이라는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흔들리지 않는 정신과 인격을 삶의 바탕으로 갈망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런 흔들리지 않는 내적 기반이 정말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내적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어느 순간에나 인격적으로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정말 맞는가? 하는 의문을 요즘은 계속 가지게 된다.
생각은 계속될수록 깊게 이어지고 이야기도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면 더 세밀하고 정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생각을 중단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면 내가 떠올렸던 많은 생각들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가졌던 생각들은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던 여러 이미지인 것이지 그것이 나의 자아는 아니다. 생각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반복 숙달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런 한 가지 생각에 몸과 정신이 온통 매여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어쩌면 일부의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바람처럼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 다닌다.
나는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있지만 정신은 항상 사방의 것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가지 주제에 매여 깊게 한 우물을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여러 것을 보고 듣고 즐기면서 구불구불 흘러가다 끝내는 보다 넓은 대양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인 듯하다. 이런 기질이 그나마 시대를 잘 만나 지금에서야 숨구멍을 틔우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마련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삶을 제대로 꾸려가는 방법은 모르겠다.
이렇게 흘러가는 마음 때문인지 항상 뭔가 불안한 느낌이 있고 그것을 잡아줄 단단한 기반으로 나름의 수행을 통해 내적 성장을 이루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향성이 결과적으로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존재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보면 내 안에서는 그 단단한 기반이 끝내 만들어질 것 같지 않다. 나는 앞으로 몇 년 아니 십수 년이 더 지난다고 해도 인격적으로 아주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반은 갖출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사실 매일 흔들린다. 하루 전에는 세상을 품을 수 있을 것은 야망과 정열을 가지고 무엇을 추진하다가도 다음날 아침 피곤에 절어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고 어제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은 마치 꿈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감정뿐만이 아니다. 감정이 흔들리면 그에 연동되는 모든 것이 따라서 흔들린다. 세상이 한없이 넓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조차 없는 것처럼 온 세상이 나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꿋꿋하게 버티고 지탱해줄 일관되고 튼튼한 인격과 성품이 내게는 없는 듯하다. 멈춤을 통해 일상의 관성을 거부한 시공간에 여백이 생겨나니 그 공백을 가장 먼저 메우는 것이 내게는 ‘불안과 허무’였다. 그 감정들이 상대적으로 내 안에 많이 발달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특정 단계로 나가기 위한 일반적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멈춘 순간에 세상을 향한 열린 감각과 여유가 나의 여백을 채울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완전한 착각이었다.
갑자기 바람을 가득 받고 있던 돛이 딱 끊어져 힘을 잃어버린 듯, 나의 내부는 열정과 열의 자체를 잃어버리고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모든 이미지와 생각들이 다 생기를 잃고 시들해져 버린다. 나의 마음은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서 그곳에 무언가 튼튼하고 안정적인 것들을 들이는 것이 원래부터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미지는 나의 마음은 그냥 바닷가의 백사장 같다. 그리고 나의 인격은 그 모래로 쌓아 올린 작은 모래성처럼 느껴진다.
매일매일 매 순간 나의 마음의 성은 일상이라는 파도에 쓸려 무너진다. 이것으로 아주 튼튼하고 견고한 무엇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나는 파도에 쓸려 다시 평평해진 모래사장을 마주한다. 어제 내가 힘들게 쌓아 올린 무엇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에 허무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난 이제 욕심은 좀 버려야 할 것 같다.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무엇은 만들 수 없지만 대신 어떤 것을 매일 새롭게 쌓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무너져 없어질 것들이지만 이 순간에 최선을 대해 부드러운 모래로 무언가를 만들어 볼 수는 있다.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새롭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것도 많이 반복하다 보면 더 자유롭게 그리고 어느 정도는 덩치 큰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이들처럼 작은 모래성을 쌓는 것이 다일 테지만 요령이 생기고 힘이 붙게 된다면 모래사장에서 훨씬 근사한 모래아트를 선보일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인격 쌓기는 그런 식으로 매일매일 새롭게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수행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사상누각 - 모래 위에 큰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인격은 고매해지기는 힘들 것 같다. 그냥 세상을 나답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좀 더 자유롭게 풀어나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있겠지만 너무 겁내지는 말자. 춤추듯 움직이는 이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따라가 보자. 너무 일관성이 없다고 나무라지 말자.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원래 그런 기질의 사람인 것이다. 그런 기질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큰 마찰 없이 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잘 관찰하고 보듬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