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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라이 Dec 26. 2023

우리는 모두 손톱이 짧았다

소소한 일상, 작은 행복의 기록 4 - 언니

언니, 어제 언니를 만났을 때, 어제의 어제까지 만나고 다시 만난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어. 자신만이 아는 굴곡진 세월의 음영이 눈가와 입가에 내려앉았을까 하고, 부풀어 오른 그것을 서로가 알아볼까 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 없이 걱정했지만, 그건 다섯 살 난 아이가 후하고 불기만 해도 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작고 평범한 찰나의 걱정이었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얼굴을 보고 탄성을 지르듯 서로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너 정말 그대로구나라고 말했을 때, 우리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손톱을 짧게 자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지. 짧은 손톱. 그것은 그 시절 우리였어.




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지만 아직도 손톱을 짧게 잘라. 피아노를 그만두고 클래식을 들을 수 없을 만큼 피아노와 멀어졌을 때에도 손톱만큼은 짧게 잘랐지. 그건 어린 시절부터 나를 만들어온 형상 같은 것이라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어.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해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나 어떤 일을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점령했지. 그것은 지층을 이루는 모래와 진흙, 자갈과도 같은 것이었어. 피아노로부터 시작된 사람들과 그로 인해 맺어진 관계, 그로 말미암은 생각과 감정, 기억, 배움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그 시절 난 좀 불행했어. 피아노가 싫었거든. 피아노로 둘러싸인 하루하루가 밧줄이 되어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나를 묶고 있는 그 밧줄을 끊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진작에 무기력해진 상태였지. 꿈같은 건 없었어. 그냥 나를 굴복시킨 그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을 뿐이었어. 피아노에 대한 미움과 순응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따르고 있는 나의 미숙함에 그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 언니 때문이었어. 언니는 천사 같은 얼굴만큼이나 순수해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만들었거든.



 

치기 싫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곡을 외우고, 쇼팽을 노래하고,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동경하며 연습실을 오가는 동안, 매 학기 통과해야만 하는 실기곡 앞에서 소리 없이 긴장하고, 연주곡을 외우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악몽을 꾸는 동안(아, 이 악몽을 나는 20년 동안이나 꾸었어), 언니의 친절과 다정함 덕분에 뭉클했고, 자주 웃었고, 즐거웠었다고 말한다면 언니는 뭐라고 말할까? 난 언니가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친절할 수 있었는지, 그런 언니의 다정함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감히 말로 표현이 안 돼.




'어제의 만남'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카페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언니를 보면서, 흐릿한 도서관에서의 재회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언니를 보면서, 우리 여전히 예쁘다고 말하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가장 순수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쁨을 느꼈어. 불행했지만, 복잡해 보이는 서로의 악보를 보며 격려했고, 연습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감탄했던 그때. 울퉁불퉁한 그때를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언니 때문일 거야. 순수한 언니가 내 곁에 있었고, 언니가 나를 순수하게 봐주었기 때문일 거야. 어제 만나서 무척 반가웠고, 고마웠어.





p.s. 그런데 언니, 아직도 손톱 짧게 잘라?





2023년 12월 23일

두 언니에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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