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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인간과 반려동물

by 무느무느

종종 우울한 나지만 다행히 생존본능인지 치명적인 슬픈 기억들은 우선적으로 흐릿해진다. 다른 기억들에 비해 보존기한이 짧아 금방 폐기된다. 하지만 영영 지워질 수 없는 몇몇 순간이 있다. 떠올리면 마음이 아릿해지는 것도 매번 똑같다.


대학교 4학년 봄 학기가 막 개강한 어느 평일이었다. 수업이 없어서 집에서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했다. 아빠가 은퇴하고 다른 도시에서 새 사업을 시작한 터라 부모님은 그곳에서 분주하셨다. 집은 조용하고 정오의 햇살은 나른했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엄마 왜? 아빠가 갑자기 쓰러지셨단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침에 어지럽다고 사무실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다 하더니 일어나지 않아 응급실로 갔고, 뇌출혈이라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설마 비극일 리 없어. 아직 울 건 아니라 생각하고 서둘러 기차를 타러 갔다.


혼자 기차를 타고 가면서 느낀 초조함, 알 수 없는 공포로 눈앞의 풍경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닌 걸 알았지만 내 팔을 한 번 꼬집어 보았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기도가 필요 없는 상황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깨어나지 않으셨고 한 달간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빠와 가깝게 지낸 건 아니었다. 떠올릴 다정한 추억도 딱히 없다. 하지만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자체로도 충격이었고, 이후에 겪은 시련 또한 큰 슬픔이자 비극이었다. 아빠와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도 난 어색하고 뻣뻣했기에 떠올리기 부끄러웠다. 아빠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든 작별의 말을 나누지 못한 것이 허망했다. 그 이후로 난 내 삶에 들인 누군가를 영영 잃는 일은 또 겪고 싶지 않았다.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임시보호 중이거나 입양을 기다리는 동물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렸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반려동물을 먼저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인터넷 글들만 봐도 아빠와의 마지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올 작은 슬픔들에도 크게 괴로울 것 같았다. 특히 동물이 아픈 곳이 있을 때 바로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 앞에서도 그동안 사랑했고 고생했고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도 못 해줄 텐데. 난 얼마나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낄까. 같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소통이 되는 것도 절대 아니지마는, 아빠와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 한 경험을 비슷하게라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도 하지 않은 관계를 상상하며 헤어짐을 걱정하다니. 이별로 인한 상처가 여러 방향으로 곪아 있었다.


큰 용기를 내어 임신을 결심했지만, 아이를 갖고서도 미리 불안해했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아이의 언어를 못 알아들어서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지. 출산이 다가올수록 불안은 커졌다. 친구들에게 힘든 마음을 털어놓았다. 특히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자녀는 없지만 반려동물을 기르는 친구들의 위로가 쏟아졌다. 반려동물이 토를 하고 먹지 못할 때의 마음. 급히 병원 진료를 봐야 해서 휴가를 써야 할 때의 마음. 이유 없이 울 때 그 속을 알 수 없어 속상한 마음. 하지만 그 옆을 지켜주면서 단단해지는 마음들. 출산 경험이 없어서 내 심정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망설였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이미 내가 두려워하는 불안과 걱정을 매일 감당해 내고 있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겸손하면서 용감하다. 그들은 자신의 공간을 양보해 동물들에게 최적의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반려동물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자 하기에 겸손하다. 반려동물이 노화함에 따라 겪는 병치레를 간호하며 건강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자원을 투입하기에 용감하다. 노년에 경제적, 정서적 지원을 받기 위해 자녀가 필요하다고도 하지만, 반려동물은 인간의 노년을 지켜주지 않는다. 동물의 노년을 인간이 지켜야 한다. 삶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 나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기혼 가정이 자녀 없이 반려동물을 키우면 의례 듣는 이야기가 있다. 아기를 낳아야지 동물을 키운다고. 애초에 동물을 키우는 일이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일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고 대안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보는 시선이 아직 존재한다. 출산이 다가오고 아이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오히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보게 되었다.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은 부모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엄마만 위대한 게 아니다. 어린애이든 동물이든 보호자와 평등하게 소통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집을 보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것처럼 긴장이 풀린다.


나도 언젠가 용기를 내보려 한다. 많은 동물들이 누려 마땅한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내 삶의 일부를 내주고 싶다. 아이는 괜찮고 동물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한 나를 반성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반려동물과 함께해 행복한 만큼 동물들도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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