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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라고 불러야 하는 시기

by 무느무느

곧 그 시기가 다가온다. 남편을 여보라고 불러야 하는 시기가.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아기들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 남편을 여보라고 호칭하기로 남편과 암묵적으로 정해놓았다. 현재 나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엄마가 아빠를 ‘오빠’라고 부르면 자녀들이 보기에 족보가 꼬인 것 같지 않나 생각해서이다.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다. 오빠라는 호칭을 놓기 싫다기보다 도당체 여보라는 말이 입에 붙질 않는다. 내가 남편에게 사용하는 ‘오빠’ 호칭은 소위 남자들이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할 때의 그 ‘오빠’ 뉘앙스는 전혀 아니다. 나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성들에게까지 스스로를 오빠라고 칭하는 남성에 대한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오빠라는 호칭이 상대 남성을 치켜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내가 남편을 칭할 때 쓰는 '오빠'는 단지 한국어 표기에 따라 여자가 손위 남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명사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오빠 대신 여보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게 된다. 찾아보니 여보의 사전적 정의는 ‘부부 사이에 상대편을 부르는 말’로 나쁜 뜻이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키지 않는 것일까? 내 마음을 나도 잘 몰라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검증해 보려 한다.


첫 번째 가설 : ‘여보’라는 단어는 윗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단어라서 거부감을 느낀다.

내 체감상 여보는 ‘영감’이라는 호칭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면 '임자'라든가. 아무튼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나이 든 부부가 되었을 때 입에 붙을 것 같은 호칭이다. 쓰고 보니 좀 염치없다. 나 나이 충분히 먹지 않았나.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든 부부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엄마 아빠는 이미 내 나이에 여보라는 호칭을 썼을 텐데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끄럽지만 난 젊은이로 남고 싶어 하는 철부지라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결혼한 지 6년이나 되었고 곧 나이 앞자리도 4로 바뀌는 데에도 인구분포도에서 내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정신적 퇴행을 겪고 있는 사람. MZ 세대 끄트머리에 간신히 속해있으면서 과한 MZ 정체성을 느끼며 요즘 사람으로 분류되고 싶은 어른 아이였나, 나란 사람. 단어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 자각이 덜 되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첫 번째 가설은 내 민낯을 마주하고 기각되었다.


두 번째 가설: '여보'라는 단어는 너무 느끼해서 낯간지럽다.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는 것은 온갖 된소리와 의성어, 의태어로 만들어진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보다 더 오글거린다. 난 남편 호칭에 있어서는 조금 건조한 편이다. 사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우리 관계에 대해 뭘 말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남편 연락처가 이름 세 글자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본 친구들은 너무 건조한 것 아니냐며 웃는다. 근데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휴대폰에 새 연락처를 저장할 때 성, 이름, 직장을 입력하도록 되어 있는데 애칭으로 입력한다면 어디에 넣어야 하는 것인가요. 어디에 넣든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연락처 배열이 꼬이게 된다고요. 남편이 나에게 특별한 존재임을 굳이 핸드폰 연락처에서 찾아야 한다면, 남편만 사진, 이메일 주소 2개, 생일, 기념일이 저장되어 있고 벨 소리도 지정되어 있다. 데이터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는 정보는 얼마든 추가해 놓을 수 있다. 이런 나와 달리 부부 사이가 아니더라도 '여보'를 연인 사이의 애칭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부라는 것은 아무래도 연인보다는 결별하기에 번거로운 점이 더 많기 때문에, 일단 부부가 되고 나면 관계를 지속해 나가려는 (혹은 참고 견디려는) 관성이 크다. 고통스러운 관계를 끊지 않고 버티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연인 사이에서 사용하는 ‘여보'는 부부의 연만큼 단단하게 결속을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로맨틱한 애칭이다. 내가 오글거림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그렇지만 나와 남편은 연인이 아닌 부부이다. 부부 사이에서 여보를 쓰는 것도 로맨틱한가? 아니다. 낯간지러울 것 없는, 상황에 맞는 단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정신 차리자, 난 기혼자다. 내가 여보라고 하면 상대가 수줍게 두근거리는 게 아니다. 당장 입 밖에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단어다. 두 번째 가설도 이렇게 기각되었다.


세 번째 가설: '여보'라는 말에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두 번째 가설과 정 반대의 주장이다. 마치 회사에서 서로를 직함으로 부르는 것처럼, 가정에서 쓰는 여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 각자의 직무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은 가장, 아내는 내조자라는 직무. 오빠가 여보가 됨으로써 결혼 전과 다를 바 없이 동등하던 우리 사이에 미세하게라도 상하 관계가 생기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경우를 가정하고 내 머릿속에서 '여보'하고 타이핑하면 뒤에 올 문장이 자동 완성된다. '여보, 물 좀 갖다 줘.' 내 두뇌가 그동안 보고 듣고 학습해 내놓은 '여보'의 용법이다. 엄마 아빠만 해도 나이 들어서 주말에 드라이브 가고 등산도 같이 갈 정도로 사이가 좋았음에도, 여보 뒤에 오는 말은 사뭇 달랐다. 물론 나 모르게 다정한 말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지만 여보라고 불리면 내가 왠지 물 떠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이 있다. 남편이 나한테 물 떠달라고 할 일은 극히 드물지만 여보라고 불릴 때마다 정수기 쪽을 흠칫 쳐다보게 될 것 같다. 남편에게 나는 계속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남편은 여보로 불리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만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는 것도 싫다. 쓸수록 논점을 이탈해 내가 이 호칭이 얼마나 싫은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가설은 핑계에 불과했고, 왜 안 내키는지 정확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실패했다.


내가 두려운 것은 우리 사이가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색의 실들이 교차하며 빈 구멍을 메꿔주는 잘 짜인 스웨터처럼 안전한 사이였다. 이제는 여기에 부모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이 추가되었다. 이미 완벽하게 짜 놓은 관계인데 주머니 몇 개를 더 만들어야 한다니 실 오라기 전체가 줄줄 풀릴까 봐 두렵다. 현재까진 함께 살며 큰 의견 차이가 없었지만 양육에 대해선 의견이 달라 부딪힐 수도 있다. 아이 돌보는 역할이 제대로 배분되지 않아 둘 사이가 예전만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우리 둘 중 한쪽을 더 선호해서 한 명이 심리적 고립을 느낄지도 모른다. 여보라는 말은 나에게 이런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어떤 엄마, 어떤 아빠가 될지는 많이 이야기 나누었지만 정작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해보지 못했다. 여보라고 부르기로 한 것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아이들이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엄청 내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하게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나의 감정을 배신하지 않아야겠다. 여보라고 부르지 않아도 엄마 아빠 사이가 돈독한 것을 아이들이 느끼면 그만일 일 아닌가. 남의 장단에 맞추지 말고 내 장단에 맞춰서 살라는 박막례 님의 명언처럼, 여보라는 역할 놀이는 집어치우고 나한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할까 싶다. 어쩌면 몇 년 뒤에는 여보라는 말이 입에 붙을지도, 아니면 우리 가족끼리만의 애칭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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