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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Aug 18. 2023

0인용 식탁

하나, 둘, 셋, …, 서른, 서른 하나, 서른둘. 식탁 위에 있는 물건을 세어보다가 30개가 넘어가자 세기를 포기했다. 식탁이 이 지경이 된 경위는 이러하다. 일단 서재방을 아가방으로 만들면서 갈 곳 없어진 노트북이 식탁 위로 오게 되었다. 식탁 한쪽에 노트북 두 대가 자리를 차지하자 4인용 식탁은 2인용이 되었다. 그러다 쌍둥이 아가들이 걷고 물건을 집어 오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밥풀처럼 흘리고 다닌 물건들을 주워 올려놓느라 식탁의 나머지 절반도 가득 차 버렸다. 그때부터 식탁은 밥 먹는 테이블이 아니라 집안 사방에서 기어 나온 물건들이 조우하는 곳이나 다름 없어졌다. 그래도 이 많은 물건들이 밥시간이 되면 어찌 저찌 한쪽으로 밀려나 밥그릇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의 자리를 내주고, 식사가 끝나면 그릇이 나간 자리에 다시 새로운 물건이 차오른다.


물건의 구성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식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만 놓여있다는 것은 매일 똑같다. 예를 들면, 선크림 같은 것이다. 내가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있으면 아가들은 열심히 기어 와서 구경하곤 했었다. 이때까지는 방심했던 게 사실이다. 아가들과 화장대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고 그들이 내 물건을 헤집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으니까. 곧 그들은 서고 걷고 뛸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까치발을 해서 화장대 위 물건들에 거침없이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히 로션, 로션, 로션에!


아가들이 로션에 환장하는 것은 범우주적 현상이다. 로션통의 생김새가 아가들에게 어떤 자극을 촉발하는 것처럼 펌프형이든, 튜브형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로션통에 끌린다. 아주 어릴 적부터 로션통을 물고 빨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 더 크면 뚜껑을 열어서 로션을 짠다. 처음엔 그러면 안 된다고 다정하게 알려주었지만, 로션을 찍어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입에서는 급박한 외침만 튀어나왔다. ‘안돼!!!’ 아가 입장에서는 로션이든 클렌징 워터든 알바가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잡은 것이 바로 내 선크림이었다. 아침에 바르고 서랍에 넣는 것을 깜빡했는데 아가들이 못 보던 물건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가 하나가 방에서 행복한 얼굴로 선크림을 들고 나왔고 나는 행여나 그걸 먹을까 싶어 얼른 낚아채 식탁 위에 던져두었다. 아가 손이 닿지 않는 식탁 정중앙으로.


내가 던져 놓은 선크림 옆에는 마사지볼도 있다. 여기저기 지압할 때 쓰던 건데 마사지건으로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후에는 TV장 안으로 자취를 감춘 물건이었다. TV장 안에는 요가링, 루프밴드, 바람을 빼 둔 짐볼, 짐볼에 바람 넣는 기구, 땅콩볼과 같은, 내가 사두고 더 이상 쓰지 않는 운동 도구들의 무덤이 있다. TV와 TV장도 안방으로 치워두었는데 아기들은 기동력을 갖추자 안방까지 진출했고, 컴컴한 TV장 안에서 선명한 민트색 공을 전리품으로 집어 왔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은 아닌데…’ 아기가 가지고 놀아도 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묵직한 마사지볼이 아기 손에서 떨어졌다. 퉁, 퉁, 퉁, 퉁, 퉁…. 큰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아차차, 층간소음. ‘응, 이거 엄마 꺼~’ 잽싸게 바닥에서 공을 집어서 치웠다. 물건을 줄까 말까 망설이면 아가들도 금세 눈치채고 달라고 낑낑 떼를 쓰기 때문에, 핵심은 보자마자 ‘엄마 거’라고 해야 된다는 거다. 다행히 이번엔 안 들켰다.


아가들로부터 대피해 온 물건이 또 있다. 며칠 전에 알라딘에서 주문한 중고 그림책. 침대에 10명의 아가들이 누워있는데 한 명씩 떨어지다가 나중엔 침대에 한 명도 안 남는다는 내용이다. 책 가장자리에 있는 다이얼을 돌리면 아가들이 한 명씩 침대에서 밀려나고, 책장을 넘기면 바닥에 떨어진 아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그림이 나오는 게 재미있었다. 내 물건을 사든 아기 물건을 사든 쇼핑이 만족스러우면 우쭐해지는 마음이 조금은 과해진다. 택배를 열어 본 내가 그랬다. 약간의 자아도취를 허락한 채 화장실에 잠시 손 씻으러 갔는데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쫙, 쫙, 쫙. ‘으악 안돼~~~!!!’ 헐레벌떡 나와보니 방금 택배 상자에서 나온 새 책의 여러 페이지가 두 동강 나있었다. 눈치 빠른 16개월 아가들은 엄마 얼굴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가 없는데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큼지막하게 찢긴 종이 조각을 보니 진짜로 내 몸의 어딘가가 아파왔다. 책은 보수할 때까지 당분간 식탁 위로 피신 왔다.


아가들의 손에 들어간 물건들은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이제 제법 큰 아가들에게 슈퍼싱글 침대를 사 주었다. 새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잘 논다 싶었는데 언젠가부터 유독 침대 끝에 붙어서 침대와 맞닿은 벽 아래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가들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빼보니 그곳엔 그들이 부지런히 옮겨놓은 장난감이 한가득 떨궈져 있는 게 아닌가. 한동안 안 보이던 장난감들이었다. 내가 먹는 두유 한 팩도 무슨 영문인지 그 틈에 놓여있었다. 떨어뜨리는 것까지는 재미있지만 그러고 나면 꺼낼 수 없어서 낑낑거릴 거면서. 그래도 아가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게 이 물건 떨구기 놀이다. 하필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언제나 자기들이 가장 애정하는 것들이고 그중에 제일은 엄마 아빠가 만지지 못하게 하는 물건. 평소에 허락되지 않는 물건을 방어가 허술한 틈을 타 손에 넣으면 소중하게 들고 다니다 어딘가에 떨궈 놓는다. 그리고 하루종일 안 보이던 에어컨 리모컨이 어쩌다 빨래통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다 갸우뚱해하는 게 이 놀이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다.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해안을 쓸고 다니는 밀물과 썰물처럼 매일 물건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을 반복하게 되자 더 이상 집을 열심히 치우지 않게 되었다. 밤에 정리해봤자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기어 나올 물건이었다. 집이 산만해서 좋은 점은, 아가 둘이 장난감 하나로 싸우고 있을 때 한쪽을 달래기 위해 잽싸게 건넬 수 있는 다른 장난감이 내 손이 닿는 거리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언제든 쓰임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식탁이고 바닥이고 놓여있는 모든 게 다 생필품이다. 생필품을 정리하고 보관하고 다시 꺼내는데 시간을 쓰지 않고 조금 빈둥거릴 시간을 벌었다. 그 시간도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에 금방 사라지고 마니까 물건으로 둘러싸인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인 것은 최대한 요령껏 쉬기 위한 전략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아가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어수선한 집안 풍경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망설여진다는 것이 이 전략의 유일한 단점이다. 갑자기 웃긴 행동을 하길래 급하게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보면, 내가 벗어 놓은 양말이 바닥에 있기도 하고 아직 개지 않은 빨래가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떻게 사진을 공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사진을 요리조리 잘라내 보지만 저 멀리 보이는 식탁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은 어찌할 수가 없다.


어쨌든 눈앞에 온갖 물건을 펼쳐놓고 사는 모습은 나만 알고 있으니까, 식탁이 이 꼴이어도 밥을 바닥에서 먹는 지경은 안 되고 있으니까, 이만큼 어질러 있는 것도 아직까지는 괜찮다. 이것도 나만 아는 사실이지만, 집에서 하는 보물 찾기도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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