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울월드컵경기장 (또는 안양, 안양종합운동장)
4,825일. 안양 시민들이 눈물을 삼키며 기다려온 시간이다. 축구로 인해, 무려 13년이 넘는 긴 세월을 눈물로 보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17 KEB하나은행 FA컵 32강전 FC서울과 FC안양의 맞대결이 펼쳐진 2017년 4월 19일. 그로부터 정확히 4,825일을 되돌린 2004년 2월 2일, FC서울의 전신 '안양 LG 치타스'는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발표한다. 공동화정책 이후 꾸준히 축구계에서 제기되어온 서울 연고 축구팀의 필요성과 2002 한일 월드컵 폐막 이후 비어버린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적극 활용해야한다는 의견에 따라, 연맹이 앞장서 추진했던 신규 구단 창단 작업이 '연고 이전'이라는 결과로 마무리된 것이다.
대다수 안양 시민들은 이 연고 이전에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프로축구연맹과 LG는 안양 시민들의 반대 의사를 철저히 묵살한 채 연고 이전을 강행했고, 그 결과 안양 시민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팀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안양을 떠나 서울에 새 둥지를 튼 FC서울이 승승장구 할수록 안양 팬들의 슬픔과 분노는 커져갔고, 그것은 조용해진 안양종합운동장을 다시 함성소리로 채우자는 움직임으로 점점 이어졌다. 그렇게 안양 축구의 부활을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은 결과, 팀을 잃어버린 그날로부터 딱 9년 후인 2013년 2월 2일. 안양의 새로운 시민구단 FC안양이 창단됐다.
찬란했던 안양 LG 치타스 시절과 비교하면 초라한 규모의 시민구단이었지만, 안양 시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안양의 축구를 부활시켰다는 사실에 뿌듯해 했다.
2013년 K리그 챌린지 무대로 뛰어든 FC안양의 첫 번째 목표는 무엇보다도 승격이었다. K리그 챌린지 소속 팀의 목표가 승격인 것은 당연하지만, 안양에게 승격은 그 어느 팀보다도 더 절실했다. 클래식 무대로 올라가 FC서울을 상대하는 것, 13년간 품어온 한 서린 메시지를 그들에게 똑똑히 전해주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안양은 죽지않았다!
2017시즌이 한창인 지금도 아직 안양은 클래식 승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두 팀의 맞대결 가능성은 희박하게 나마 매시즌 열려 있었다. K리그 클래식과 챌린지를 포함해 그 아래 하부리그 팀까지 모두 참가하는 FA컵에서는 대진 추첨에 따라 맞대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의 2017년 3월 7일. 축구회관에서 열린 FA컵 3, 4라운드 대진 추첨 결과, 마침내 서울과 안양이 32강전에서 맞붙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3라운드에서 안양이 호남대에 승리할 경우, 4라운드에서 서울을 만나는 대진이 완성된 것이다.
'원수' 서울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양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3라운드 경기 결과에 따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탈락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들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추지 않으며 꾸준히 구단 SNS를 통해 서울과의 결전을 예고했다. 그리고 3월 29일, 간절함으로 얻어낸 1:0 신승으로 3라운드를 통과하자 구단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본격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서울은 안양과 달리 이번 경기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서울 입장에서는 과거의 일로 자신들을 원수로 치부하며 자극하는 안양의 도발에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냉정히 말해 서울에게 안양은 그저 한 수 아래 팀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일 저녁에 열린 FA컵 32강전이었지만, 둘의 관계가 관계이니 만큼 K리그 팬들의 관심은 집중됐다. 일부에서는 안전상의 우려도 제기됐다. 감정이 격해진 양 팀 서포터들이 충돌할 가능성이나 경기 중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염려였다. 그 결과 이날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는 이를 예방하기 위한 경찰 병력이 배치됐다. 국내 축구 경기에서 팬들의 과열이 우려돼 경찰 병력까지 배치되는 일은 '슈퍼매치' 같은 일부 더비 매치를 제외하곤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실제로 킥오프 휘슬이 울리기 전부터 우려했던 장면이 펼쳐졌다. 양 팀 선수들이 자기 위치에 선 뒤 심판이 시계를 쳐다보며 킥오프를 선언하기 위해 휘슬을 입에 물던 그 순간, 안양 서포터 석에서 붉은색 '불결'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종종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홍염이지만 지금은 안전상의 문제로 반입 자체가 금지된 물건인데, 안양 서포터들이 단체로 원정석 한가운데서 보란듯이 피워올린 것이다.
나를 포함해 이날 경기장을 찾은 4,277명의 관중들은 103개의 홍염이 만들어낸 광경에 순간적으로 감탄했다. 홍염이 금지된 물품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붉은 불빛이 서포터 석을 가득 채운 그 광경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이색적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홍염을 터트리는 행위가 벌금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양 서포터들 역시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대규모 퍼포먼스를 단행했다.
이날의 홍염 퍼포먼스는 자신들의 팀을 빼앗아간 FC서울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그들이 지난 4,825일 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슬프고도 벅찬 감정의 표출이었다. 홍염 연기로 경기장이 자욱해져 경기 시작이 조금 지연됐다는 점과 명백한 규정 위반 행위를 행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문제는 있었지만, 어쨌든 역사에 남을 퍼포먼스였다는 점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팬들이 예상한 대로 두 팀 사이에는 분명한 실력차가 존재했다. 전년도 리그 우승팀이자 매년 최상위 리그에서 우승을 다투는 서울에게 4년 동안 챌린지 무대를 벗어나지 못한 안양은 분명 한 수 아래 팀이었다. 경기는 윤일록의 두 골로 서울이 가볍게 승리를 챙겼다.
하지만 안양 선수들은 90분 동안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13년 전 그 당시 슬픔을 직접적으로 겪은 선수는 없었지만, 선수들 모두 서포터와 시민들의 슬픔에 공감했다. 안양 시민들에게 슬픔을 안겼던 서울을 상대로 어느 때보다 투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FC안양의 선수로서 서포터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슴 깊이 새긴 인상이었다. 안양 선수들은 패하더라도 무기력하게 지는 모습만은 서포터들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열정적으로 경기장을 누볐다.
안양 서포터들에게도 이날의 90분은 특별했다. 서울의 득점이 터지던 순간에도, 패배가 확실시 된 이후에도, 경기 종료가 선언된 후에도 함성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 그들의 서포팅은 90분 동안 경기장을 누빈 선수들을 향해 보낸 응원일 뿐 아니라, 지난 4,825일의 시간을 기다려 온 스스로에게 보내는 처절한 '한풀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서울과 안양의 맞대결은 그들이 이어온 지난 13년의 긴 악연 만큼이나 이야깃거리가 넘치고 흥미로운 경기였다. 평일 저녁의 FA컵 경기에서 기록한 4,277명이라는 관중 수는 이 두 팀의 맞대결이 앞으로 K리그를 대표하는 라이벌 경기로 거듭날 수 있음을 예고했다.
두 팀이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두 팀의 성적에 따라, 혹은 운에 따라 그날이 내년이 될 수도 혹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FC서울과 FC안양의 맞대결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면, 그 때는 경기장으로 향해볼 것을 무조건 추천한다. 각자의 지지자들을 위해 서로에게 만큼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두 팀의 맞대결, 그야말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직관이다.
글·사진 - 이준호 (K리그 전문 컬럼니스트를 꿈꾸는 청년)
영상 - FC안양,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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