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혼비 <런던스타일의 책읽기>의 유머
늘 가던 카페지만 일요일엔 다른 표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구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늘 앉던 자리엔 사람이 있고, 내부는 평일과 다르게 북적인다. 한 테이블이 비어있긴 한데, 혼자라서 4인석이라 앉지 못하고 있었더니 눈치 빠른 알바생이 자리를 가리킨다.
"저쪽 자리는 어떠세요?"
다행히도, 벽 쪽 맨 끝자리에 2인 테이블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 이 카페를 다녔는데 이 자리는 처음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바질 샌드위치를 시켜놓고 책을 펼쳤다.
한참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풍경이 보인다. 자리를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 카페 안을 멀리서 조망해 보는 시선이 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 같다.
바 자리에선 누군가가 엎드려 자고 있고, 구석 자리에서는 통기타를 친다. 강아지들도 마룻바닥 위를 어슬렁거린다. 테이블마다 노트북이 있고, 무슨 얘기인지를 다들 신나게 떠들고 있다. 하얀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의 학생이 옆 테이블 의자에 앉아도 되느냐고 묻고, 옆 사람은 가방을 치워준다.
문득 몇 년 전 여름의 기억이 떠오른다. 회의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카페에 들러서 책을 보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학생이 내 테이블 위에 던져놓은 책을 보더니 물었다.
"이 책, 저도 읽었는데...완전 재밌죠?"
"네? 아...아직 읽기 전엔데, 재밌을 거 같아요."
그 학생은 슬쩍 웃었고 우리의 대화는 그게 전부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학생이 얼마나 그 작가를 좋아하는지를. 아마도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그 작가의 유머가 내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 작가 닉 혼비는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ility> 등의 원작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축구광이자 빼놓을 수 없는 록매니아이다. 실제로 뮤지션들과도 공연을 같이 하던 멋진 작가로 기억하는데, 그 날 내가 너무 웃었던 그 책의 일부를 메모해두었다.
책, 그러니까 무슨 종류든지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휴가 때 호텔 수영장에서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확률이 낮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자신이 쓴 책을 읽고 있지 않은지, 당장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이가 내가 쓴 멋들어진 책 300페이지를 읽어나가면서 울고 웃느라 너무 열중해서 수영도 하지 않고, 에비앙 생수 한 모금 마시지 않는 모습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황송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파라솔 아래서 며칠을 보내다 바로 그 상대와 장차 우정을 나누거나, 심지어 배우자가 되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나는 두 해 전, 수영장 반대편에서 내 첫 소설 '하이 피델리티'를 읽고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일주일을 보내면서 이 특유의 망상증을 고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누이동생과 매제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매제는 신이 나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해설을 늘어놓았다.
"저 봐! 저 사람 입술이 움직이고 있어." "저런, 또 잠들었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어젯밤에 바에서 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어봤어.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니더군." 어느 순간, 그녀는 놀랍게도 책을 내려놓더니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매제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눈을 뽑아버리러 간 거로군!" 그녀가 간신히 그 책을 다 읽고, '해리포터'든, 닥터 수스의 그림책이든 가방에 챙겨온 다른 책으로 넘어가자 나는 겨우 마음이 편해졌다.
-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중에서
닉 혼비의 매제 역시 '고스트 라이터'를 쓴 유명작가이다. 매형을 놀리는 모습이 흥미로운데,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마지막 그 한마디이다.
"눈 알을 뽑아버리러 간 거로군!"
말하자면 안 본 눈을 사고 싶은 심정을 격하게 표현한 것이다. 글 좀 쓴다는 작가들끼리 예를 갖추고 극찬해주고 이런 거 없다. 그 편안함과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받아들이며 한편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망상을 유머로 폭발시켰다.
우리가 카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맛있는 커피? 화려한 인테리어? 친절함?
조건을 따지자면 끝도 없겠지만 단 하나를 고르자면 그 카페에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편안한 익명의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익명으로 남고 싶은 무리를 찾아가는 건지 모른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그 카페에서 듣고 좋아하게 된 음악, 그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The Volunteers - Summer
https://www.youtube.com/watch?v=13EWqjMqkiY
*밴드의 시대는 갔나 했는데 백예린의 용기가 놀랍다. 백예린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