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
길을 지나다 작은 입간판을 보고 멈춘다.
'레이몬드 Raymond'라고 작게 프린트된 글씨 때문이었다.
20년은 거뜬히 넘었을 법한, 오래된 작은 주택인데 카페로 개조했다. 벽을 허물어버린 작은 마당에는 시멘트가 드러난 붉은 벽돌 계단이 보이고 바닥에 인조 잔디를 깔았다. 마당 한쪽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이어진다. 창가 바깥쪽에 나무 의자들을 몇 개 갖다 놓았고, 계단 아래에는 옛 재봉틀 책상이 놓여있다. 카페 주인이 신경 쓴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진짜 궁금증은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 레이몬드가 혹시 그 '레이몬드' 일까?
롱블랙을 하나 주문하고, 내부를 구경하다가 방처럼 구분된 공간에 자리 잡았다. 창가에는 책이 몇 권 놓여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퀴즈쇼에서 정답이라도 맞힌 듯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레이몬드 카버의 책들 몇 권이 놓여있었다. 벽에는 레이몬드 카버를 그린 드로잉과 함께 카페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는 포스트가 붙어있었다. 카페 주인이 염두에 둔 레이몬드 작가는 세 사람이었다.
레이몬드 카버, 레이몬드 챈들러, 레이본드 브릭스.
이 작가들을 표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카페였다. 그래서 이름이 레이몬드.
레이본드 브릭스는 잘 모르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레이몬드라는 이름에는 글쓰기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것인가. 레이본드 브릭스 역시 꽤 유명한 그림책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레이몬드 카버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카버는 19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기 때문에 단편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단편들이야말로 우리가 단편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대단한 사건도 없고 별 다른 일도 아닌 소소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 깃들어있는 시선과 발견은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한다.
그중에서도 많은 독자들이 손꼽는 <대성당>은 아내의 오랜 친구인 로버트를 집으로 초대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나'와 아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알아오던 친구 로버트는 장님이다. 아내는 장님인 그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으로 고용되어서 가까워졌다. 아내로부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나는 사실 장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리 큰 관심도 없다. 억지로 잘해주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닌 덤덤한 태도가 묘한 균형을 이루다가 느닷없는 유머가 스타카토처럼 끼어든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둘러앉아서는 또 한 잔씩 술을 마셨다 아내는 로버트의 접시에 스테이크와 감자, 콩 따위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나는 그를 위해 두 조각의 빵에 버터를 발라 주었다. "자 여기 빵에 버터를 발랐으니 드십시오."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이제 기도를 합시다." 그러자 장님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밥 먹는 동안 전화가 와서 음식이 식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아멘"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중에서
술을 한 모금 물고 기도하자는 것도 어이없지만 내용은 더 웃기다. 물론 음식은 식으면 안 되는 건 맞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도 지금은 이렇게 옛 친구를 초대하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삶에서 무너질 뻔했던 순간들이 엿보이는데, 넘어진 아이가 무릎 털고 훅 일어나서 가던 길 가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지나치게 한다. 카버는 상처에 돋보기를 들이대서 파헤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게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농담이 문득 자기 전에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어도 늘 그랬던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종종 만남에서 셋이 있다가 한 사람이 빠지면 어색한 순간을 맞는다. 소설의 '나' 역시 그렇다. 사실 내 친구도 아닌데 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아내가 다시 오는가 싶더니, 잠들어버렸다. 나와 장님은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나는 장님에게 자러 가겠느냐고 묻는다. 편하게 넘어갈까 했더니 장님은 콕 집어서 말한다. 당신과 함께 더 있고 싶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지 않느냐고.
관계의 불편함.
요즘은 사람을 만나서 단 1초의 불편함도 못 견디는 시대 같다. 전화 통화도 불편하고, 뭣도 불편하고... 불편함이 삶 속에 몰아내야 할 악당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데, 돌아보면 어떤 만남이든 처음부터 편안할 수는 없다. 낯선 마주침 또는 어색한 자리의 불편함을 조금 참다 보면 새로운 단계로 갈 수도 있다. 그걸 견뎌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소설 속의 나는 괜찮다고 인사치레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진다. TV에서는 교회에 대한 방송을 하고 있고 두 사람 사이 대화도 살짝 삐그덕거리지만, 그 엇박자마저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TV에서 나오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 내가 장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장면이 이어지고 장님이 묻는다.
"프레스코 벽화요, 친구?" 로버트가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물었다. 나도 내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나는 까마득한 기억을 있는 대로 짜내며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았다, "저게 프레스코 벽화인지 묻는 겁니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좋은 질문이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중에서
풉- "좋은 질문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라니. 이런 순간이야말로 대충 아는 척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눈이 안 보여서 사실 확인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하지만 어쩐지 모르겠다는 '나'에게 더 믿음이 간다.
이후에도 TV에 나오는 성당을 설명해 주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되고 장님은 계속 질문하지만,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 느낌에 두 사람은 답답해진다.
이건 꽤나 쉽지 않은 과제이다. 신통치 않은 설명에 점점 지쳐가는 두 사람. 그래도 장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나에게 두꺼운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 집안 어디에 갑자기 두꺼운 종이가 있나? 나는 쇼핑백을 가져다가 안쪽 면을 펼쳐 놓고 나서 두 사람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는다. 성당을 그려달라는 말에 펜으로 종이 위에 그려나가다가, 장님도 나의 손을 맞잡고 함께 펜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장님의 호기심과 설명해주고 싶은 나의 열망이 만나 함께 선을 그려나간다. 이런 것도 그려보라는 장님의 요청이 이어지고, 아내는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리둥절하다.
이윽고 그가 손을 놓았다. " 다 된 것 같군. 한번 보시오. 어때요?"
하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마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모르지만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어때요?" 그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고 있소?"
나는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내 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어딘가의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말 멋진 그림이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중에서
눈을 뜨지 않았다는 선택에서 느껴지는 울림이 어마어마하다. 상대방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득 채워지는 어떤 것.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이 집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미 나는 그 너머의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건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대성당을 보여주었다는 환희, 그리고 내가 되어보리라고 생각도 못 해본 어떤 것을 손으로 만져본 기쁨이다.
이처럼 사소한 움직임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전해준 엔딩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다린 -꿈
https://www.youtube.com/watch?v=u_STqv0hM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