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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Jul 29. 2024

릴리슈슈의 후예들

햇빛 찬란했던 언더그라운드의 나날들

햇살이 한창 뜨거울 때 우리는 그늘을 찾는다.

젊은 날도 그렇다.


모두가 한창 좋을 때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때, 나와 몇몇 친구들은 그늘진 땅밑의 허름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있곤 했다. 신촌과 홍대 사이, '백스테이지'라는 뮤직비디오 감상실이었다. 별다른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커다란 스크린에 낡은 소파들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그곳에 가는 날을 늘 기다렸다. 웰치스 한 캔을 시켜놓고 화면에서 쏟아지는 음악을 듣는 것이 좋았다. 시험이 끝났을 때에도, 친구를 만나 실컷 떠들고 난 후에도, 극장에서 영화롤 보고 나서도 우리는 백스테이지로 달려가곤 했다.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오프닝에는 온통 파릇한 청보리밭에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에서 음악에 의지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릴리슈슈'의 팬페이지를 만들어서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과 통신하며 자신만의 우주에서 '에테르'를 감지한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자신만의 에테르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그 음악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로나 신촌에 몇 군데 이런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장르 별로 모이는 사람들이 달랐다. 내가 다니던 곳은 얼터너티브락, 모던락을 주로 틀던 곳이었다. 유튜브는 없던 시절이었지만, 우리에겐 MTV가 있었다. 지금처럼 현란한 CG와 셋트는 아니어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영화 못지 않은 뮤직비디오들이 마구 만들어지던 때였고, 무엇이든 초창기의 열정은 그 시기만이 갖는 에너지와 순수함이 있다. 너바나(Nirvana), 스매싱펌킨스(Smashing Pumpkins), 오아시스(Oasis) 등은 모두 다 백스테이지의 스타였다(물론 이미 그들은 스타지만). 웰치스 한 캔에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한 두 시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없는 호사였다. 


그 우주의 강렬한 스타들 사이에서 아주 옅은 빛을 내는 별이 있었다. 그 밴드들은 일단 노이즈를 몰고 왔다. 기타 소리가 선명하지도 않고 노래는 부르는데 목소리는 기타에 묻혔다. 게다가 얼굴도 잘 안 보였다. 그들의 뮤직비디오는 주로 거친 화면에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이루어졌고, 연주하는 모습은 다들 고개를 숙이고 기타만 친다. 내 친구 하나는 집에서 그들의 음악을 틀어놓았다가, 엄마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며 달라왔다는 얘기를 한 기억이 있다. 헤비메탈은 음악으로 인정하던 엄마도 그 소리의 정체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음악도 잡음도 아닌 소리, 노래인지 웅얼거림인지 알 수 없는 멜로디. 악기 연주에만 몰입하는 음악가들. 그들은 연주할 때에도 객석이 아니라, 자신의 구두만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 음악을 슈게이징(Shoegazing)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타디움같은 대형 콘서트홀에서 쇼맨십을 보이며 하는 공연을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악기만 바라보며 묵묵히 연주를 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 우주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BV, My Bloody Valentine), 지저스 앤 메리 체인(Jejus and Mary Chaine), 슬로우 다이브(Slowdive)등 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는 눈에 띄고 주목받는 큰 별들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때로는 그 연약한 빛이 어느 세계의 그늘을 비춘다. 

그 음악을 들을 때면 그들이 나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혼돈과 불안. 몽상과 우울,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 그럼에도 그 어디쯤에는 나의 목소리가 있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절망인지 망상인지 혹은 슬픔인지 확실히 보이지 않고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잡히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거나 화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렇게 사라지는 것일까? 희미해지는 기타 리프처럼?


슈게이징의 선구자로 꼽히는 MBV도 발매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가들 사이에 영향을 미쳐서 세월이 지나서도 그들의 음악은 계속 회자되고 있다. 여러 밴드의 음악 곳곳에 슈게이징이 녹아있다. 영화 속의 배경음악이 된다. 새로운 세대의 슈게이징 밴드가 등장한다. 한번 들어도 귀에 꽃히는 멜로디, 매혹적인 목소리로도 주목받기 어려운 시대에 왜 우리는 웅웅대는 잡음과도 같은 그 음악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왜 구두만 바라보며 침잠하는 그 멜로디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왜 지하의 어두운 그곳에서 지글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화려하고 눈부신 햇살은 늘 머물고 싶은 장소이면서도 한편으로 나 자신의 결함까지도 너무 환하게 비추이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언더그라운드로 달아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반짝이는 보석이나 금붙이를 두르고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스타들에 동요될 수가 없었다.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만한 목 늘어난 티셔츠에 오래된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그늘진 곳을 찾아 휘적휘적 걷는다. 커트 코베인의 낡은 가디건처럼, 노엘 갤러거의 아무렇게나 걸친 점퍼처럼. 거칠고 하찮은 것들이 나를 말해준다고 느꼈다.  

분노가 터져 나오는 폭발하는 멜로디보다 무엇인지도 모를 불안과 혼란에 대해서 파고드는 노이즈가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들렸다. 눈부신 조명 아래 화려한 몸짓과 매너로 무대를 휘젓는 가수들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우리의 위로는 내면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슈게이징(Shoegazing) 밴드에서 찾았다.


이따금 목가적인 작은 마을의 십대들이 그런 동네에 통 어울리지 않는 절망의 의상을 입은 모습을 본다. 너덜너덜하고 얼룩져 있고 갈기갈기 찢긴 옷, 내가 젊었던 시절의 패션이 남긴 유물 같은 옷.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의 그 단계에는 지하 세계가 그들의 진정한 집이고, 도시의 빈민가나 이면이 그나마 그런 세계에 가장 근접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때는 몸속의 생체 시계마저 바뀌어, 최소한 몇 년 동안 야행성 동물이 된다....
스물여섯 살에 죽은 키츠는 "나는 안락한 죽음과 어설픈 사랑에 빠졌었다"라고 말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죽음은 그 시절에는 그저 몽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리베카 솔닛, <길잃기 안내서> 중에서 


몽상과 우울로 침잠하는 그 음악의 특성상 슈게이징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옛이야기가 되어가는 줄 알았는데, 최근 슈게이징의 징조들이 여기저기서 출현하고 있다. 영화 <애프터 양>의 AI가 즐겨 듣는 음악은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소년이 듣던 그 노래였다. 

(Mitski -Glide https://www.youtube.com/watch?v=ur8_4stBye0) 그리고 이와이 슈운지야말로 우리가 말로 다 할 수 없어서 슈게이징을 들을 수 밖에 없던 그 정서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슈게이져'이다. 그는 청춘이 아름답고 눈부신 것이라고 말할 때,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그늘,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는 그 시절의 고통을 파고들었다. 이와이 슈운지의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그렇게 영원한 젊음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방에서 혼자 음악을 만들고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한국의 밴드가 있다. 그의 앨범 커버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한 장면에서 가져왔다. 그는 혼돈과 불안 속에서 멜로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꿈은 어두운 방에서 시작하여 온 세계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최근, 슬로우다이브(Slowdive)는 오프닝 무대를 파란노을에 내주었다. 한 때의 음악, 사그라들 수밖에 없는 장르라 했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세월은 가고 젊음은 과거가 된다. 하지만 그 시절의 마음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슈게이징은 계속된다.  

토요일 저녁 그의 공연을 볼 것이다.


파란노을 -아름다운 세상

https://www.youtube.com/watch?v=gb9Qqt75r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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