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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Aug 05. 2024

말해지지 않는 기억의 그림자들

앨리스 먼로의 <망상>

한강으로 이어지는 홍제천을 산책하다가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서 멈춘다.

긴 머리처럼 드리운 여린 가지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듯 보이는 가지와 잎들 때문일까. 잘 가꾸어진 가로수들이 모범생 같다면, 버드나무는 어딘가 아웃사이더 같은 인상을 준다. 버드나무라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우당탕탕 뜀박질하는 모험담의 한 구석쯤은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버드나무는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영화 <스탠 바이 미 Stand by me>의 네 소년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다.


말해지지 못한 모험담도 있다. 어떤 일들은 겪고 나서도 다시 말로 꺼내기가 두려운 법이다. 앨리스 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방식에서 다가오는 놀라운 순간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소년들의 치열한 모험담 못지않게 소녀인 소설 속의 '나'에게도 느닷없이 다가온다. 

해질 무렵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사향쥐를 잡는 덫을 살피러 밭을 건너 숲으로 간다. 


이 근처 강둑에는 버드나무 대신 내 키보다 큰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아버지가 강기슭으로 내려간 사이 나는 강둑 중턱에 난 길에 서 있었다. 덫을 살피느라 허리를 구부릴 때면, 아버지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는데 무언인가 색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한 남자가 저 멀리 강둑에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성긴 수풀을 지날 때에야 비로소 그 남자의 나머지 모습까지 다 보였는데, 길고 가느다란 다리는 날렵했고 얇고 칙칙한 옷을 둘렀으며 손에는 햇빛에 반짝거리는 무언인가가 들려있었다, 그건 작은 도끼, 무기로 쓰는 손도끼였다. 


인적이 드문 숲에서 나와 아버지는 날 선 도끼를 손에 든 남자와 마주친 것이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버지의 친근한 인사말이 시작된다. 그 남자는 아버지와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범죄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법. 조라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불러가며 억지스럽지 않게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아버지에게 그도 반응하기 시작한다. 조는 나무를 베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겁을 주려고 손도끼를 가져왔다고 대꾸한다. 일단은 적대감은 풀었지만, 조는 아버지와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집이라기보다는 토굴 같은 곳에 도착한 나와 아버지의 역할극이 시작되었다. 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게 이 어색한 모든 상황들을 넘겨야만 한다.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집안의 살림들을 나는 보이지 않는 척하고 앉아있다.


고립되어 사는 남자에게는 고양이도 하나 있는데, 그는 접시에 위스키를 따라 고양이에게 준다. 숯 위해서 비틀거리는 고양이가 있는 풍경이 불길하다. 애써 권하는 위스키를 고양이만큼 위가 좋지 않다며 거절했는데, 조는 여자애가 먹을 것을 준다며 나에게 내민다.


나는 제발 아무것도 없기를 속으로 빌었건만, 그 남자는 기어코 크리스마스 캔디 한 통을 찾아왔다. 줄무늬 색깔이 번져 있는 것으로 보아, 녹았다가 굳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게 틀림없었다, 사탕에서 쇠못 맛이 났다. 

계속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던 그 남자는 손도끼를 들어 탁자를 내리쳐 갈라지게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놈들을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가 이어지고, 아버지는 그를 살살 달랜다. 동네 미치광이 살인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기분을 맞추고, 사고가 나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아버지의 심정은 살얼음판을 지나는 듯 날카롭다. 술 취한 고양이가 발작적으로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나는 몸이 풀리자 졸기 시작한다.

"그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너도 봐서 알겠지만 사향쥐가 가득 든 자루와 널, 둘 다 떠메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나를 향해 호통을 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도끼를 든 그 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데, 아버지는 아무도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숨기려 해도 그런 일들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날 나와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갔어야 할 사람의 집까지 들어가서 무사히 탈출했다는 것을. 그 후로는 다시 그 일을 입에 담지 않는다. 


흔히 아이들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아이였을 때에도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 특히 도끼 든 남자의 실체를 마주친 그 감정에 대한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워낙 놀랠 광경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절대 서두리지 않고 살금살금, 흐뭇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치 사람들이 애당초 기원하고 희망해서 최후의 무시무시한 것들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런 남자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문 뒤에, 복도 끝 어둑한 구석에 있었다는 걸 나는 살아오면서 줄곧 알고 있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공포와 두려움의 기억이 조금씩 서려있지 않은가. 묻히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처의 흔적 없이 깨끗한 성장은 동화 속에도 없다. 


낯선 사람들 -버드나무가 있는 공원

https://www.youtube.com/watch?v=aAiEcsX3J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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