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머서의 <시간이 멈춰 선 파리의 고서점>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 친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난 거기에 살고 싶었어."
이상하게도 그 말은 로맨틱하게 들렸다. 사람이든 장소든, 혹은 어떤 대상이든 지금 그것과 함께 살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미 살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충분하다.
서점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개브리얼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에는 서점의 작은 다락방에서 자란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운명처럼 그 서점은 환경이 되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파리의 그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파니>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다.
제레미 머서는 캐나다의 신문 사회부 기자였는데, 범죄소설을 썼다가 그 책에 수록된 범인으로부터 협박에 시달리면서 파리로 도망친다. 사표를 던졌고 무일푼 노숙자 신세가 되어 파리를 어슬렁거리다가 그 서점에 닿게 된다.
백 년도 넘은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파니'의 낡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3층에는 침대와 책상이 있어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책냄새가 고즈넉하게 내려앉은 아늑한 호텔로 생각했다가는 충격을 받게 된다. 소박하고 정갈한 방 정도로 기대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고양이도 끝없이 몸을 털고 반쯤 죽은 새와 쥐를 서점 구석으로 끌고 와서 더러움에 한몫했다. 빈대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식구들이 무척 가려워해도 조지는 중상모략이라고 우겼다... 3층 살림집에 초대된 어느 명망 있는 잡지 에디터는 한 시간도 안 돼 호텔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에게 베개 위를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퀴벌레는 첫 경고였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놓인 곰팡이 핀 사과 스튜가 최후의 일격이었다.
위생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2000년 무렵, 그 서점에서 자고 간 사람은 4만 명이 넘었고 파리의 꿈을 좇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몰렸고 제레미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도시를 가득 메운 빛과 환희가 눈부셨기에 그 정도의 고생은 사소해졌다. 그곳엔 낮보다 눈부신 밤이 있었다. 남모를 내면의 어둠과 그림자까지 내보여도 누구도 다치지 않는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파리의 공기는 어둠까지도 반짝이게 했다.
서점은 침실을 같이 쓰는 친구가 계속 바뀌는 밤샘 파티장 같았다. 평범한 인간관계에 대한 개념 역시 무뎌져 갔다. 자다가 눈을 떠보면 내 앞에서 낯선 사람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어도 무감각해졌다. 파니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점에 돌아오면 새로운 사람이 내 침대를 껴안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저 담요를 덮어줄 뿐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이 들어온 날이나 갈 목적지도 묻지 않고 그저 서점에서 자는 사람으로 부르게 되었다.
제레미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짝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뛰어난 글솜씨에 좌절하여 돈을 몽땅 털어 와인을 사마시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찾아 정신없이 헤매고 빠져들고 있을 때, 한번쯤은 통과하게 되는 밤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지 못하는 내 이야기를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 공기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함께 있는 사람들도 모두 털어놓게 만든다. 그 역시도 치열하게 신문기자로 범죄를 다루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들었던 과거를 보여준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쫓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르는 나 자신을.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 남자는 나를 조심스레 보더니 갑자기 활짝 웃었다. 그 표정은 내 기억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젠장,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는 내 등을 세게 치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는 내 죄를 사했다. 그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게 됐다.
대화는 표정으로 완성된다. 말의 소리가 오가고, 그것을 듣는 눈빛과 그리고 말하거나 들을 때의 표정. 그 시절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우리가 대화를 할 때 기대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세월이 나에게 험악할 때 스스로 정상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서점에서 누구보다도 독특한 것은 서점 주인 조지였다. 촛불로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 원하는 길이까지 타들어가면 불을 꺼서 머리를 자르는 조지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이윤이라고는 나지 않는 이상한 서점을 운영하는 그는 돈이 없어 보이는 손님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
조지와 내가 소책자를 쓴 옛날 사진을 보고 있을 때 기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서류철 상자를 뒤지는 사이, 조지는 옛날 지갑을 발견했다. 지갑 안에는 1,400프랑이 들어있었다. 조지는 나에게 지갑을 주었다, 자신을 찾는 동안 들고 있으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나는 조지가 상자는 다 뒤지고난 뒤에 지갑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조지는 손을 흔들면서 나중에 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날 오후에 달라는 말이라고 짐작했다, 나중에 다시 돌려주려고 하자 조지는 바보를 보듯 나를 보았다.
티 내지 않고 돈을 주려하는 주인의 연기와 눈치꽝인 나의 밀당이 만만치 않은 장면이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눈빛이 말해준다. 너 바보 아니지.
일은 열심히 했지만 미디어산업의 병폐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제레미도 이 이상한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회복되어 간다. 잃었던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올바른 질문을 갖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곳을 떠날 즈음 서점 주인 조지와 나눈 대화가 그들이 보낸 시간을 말해준다.
냉장고에 차가운 칭다오 맥주 두 병이 있었고, 우리는 3층 살림집에서 저무는 석양빛으로 색을 갈아입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바라보았다, 조지의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표정이었다. 나는 지난 1월 비 오는 일요일에 셰익스피어 앤 컴파니를 발견한 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지는 내가 더는 말을 못 하게 막았다.
"있잖은가, 내가 항상 이곳에 대해 꿈꾸는 게 있어. 저 건너 노트르담을 보면, 이 서점이 저 교회의 별관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 저곳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별관."
이상주의자 서점 주인 조지의 결정체인 서점은 그렇게 휴머니스트들의 성지이자 책박물관이 되었다. 지금은 숙박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서점 내부에 촘촘히 적힌 손님들의 메모들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독특한 유토피아의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서점의 스토리를 밖으로 내보낼 작가는 이 책의 저자 제레미 머서였던 것이다. 서점은 그의 삶을 바꾸었고, 그는 서점의 이야기를 남겼다.
삶을 새롭게 발명해야 할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José González - El Invento
https://www.youtube.com/watch?v=j3_Zz0O4p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