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챈들러 의 <기나긴 이별>
늦은 여름밤, 잠을 청하다가 책을 집어든다.
무심코 넘긴 페이지에는 안경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작가의 고백이 있다. 알코올중독과 거식증 경험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그 책에 캐롤라인 냅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말한다. "나는 다음 생에는 안경점에서 일하고 싶어." 환상의 형태가 살짝 달라질 때도 있지만 - 은행 창구 직원이 되고 싶을 때도 있고, 24시가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있고, 와이오밍주의 목장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있다. - 보통은 안경점이다. 나는 그 일이 직접적이고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점에 끌린다. 하루 종일 손님들을 의자에 앉히고, 안경테를 골라주고, 작가 같은 직업이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 주려고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애쓰는 것과는 달리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는 것이다.
- <명랑한 은둔자 The Merry Recluse, 2020> 중에서, 캐롤라인 냅
작가의 심정을 따라가본다. 직접적이지 않고 미스터리가 깃든 세계에 끌려 작가가 되었겠지만, 그 모호함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좋아서 발들인 것들이 돌연 표정을 바꾼다. 그 일을 좀처럼 견디기 힘든 때가 온다. 한 사람을 반하게 했던 장점이 그와 헤어질 이유가 되는 것처럼, 내가 좋다고 시작한 그 일에 몸부림치게 되는 날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세상 보는 눈을 갖게 해 준다는 작가라는 직업의 알량한 의미 따위는 집어치우고, 실제로 누군가의 시력이라도 교정해 주는 선명한 결과가 바로 드러나는 일을 한다면 이보다는 훨씬 보람 있지 않을까.
한번 그 시기에 들어가면 평소에 좋았던 것들이 슬슬 못마땅해진다. 비교적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프리랜서 작가들이 누리는 매력이겠지만,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일이 끝나고 공백이 길어지면 그늘이 따라온다. 사람의 마음이란, 일이 한창 몰릴 때는 평생 갈 것 같고 일이 없을 때에는 언제까지고 이런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아진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잠깐, 짙어지는 불안의 그림자를 붙들고 씨름하는 나날이 이어진다. 그러다 수다 모임에 나와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게 된다. 밤마다 맥주를 한 캔씩 따야 잠이 들어요. 혹은, 이런 질문. 우울증 치료 잘하는데 아세요? 한 시도 쉴 줄 모르는 성격이라면 다른 분야 공부를 시작했거나 이미 자격증 클래스 등록 완료. 이걸로 한 달에 얼마는 고정 수입이 된다는데 해보고 밥을 살게요.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그 친구들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어쩐 일인지 여전히 우리는 그 일의 테두리 안에 있고 그 소용돌이 속으로 어느새 같이 빠져들고 있다. 어이없는 일들, 놀랄만한 사건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나가고 겨우겨우 일을 마무리한다. 그래도 못다 한 말들이 있어 만난 자리에서 실컷 부조리한 상황들을 토로하다가 문득 잊었던 질문이 떠오른다. 근데, 저번 자격증은 어떻게 됐어? 새로 시작한 공부는?
친구의 눈동자에 다른 빛이 돈다. 잠깐 시간의 저편을 떠올리다 현재에 도착한다. 눈꼬리가 살짝 웃는다.
일 하다가 결국 못 갔죠, 뭐.
그래서 결국 다른 길로 틀었다는 얘기는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정말로 이상하게도 다른 곳을 기웃대고 있으면 옷자락이라도 잡아끌듯 일이 찾아와 그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여기저기 도망해 볼까 시선을 돌리면 어깨를 툭툭 두드려 거기 아니라고 사인을 보내는 것처럼.
이런 일들을 자주 보다 보니 과연 '나의 일'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젠가 잡지에서 봤던 영국 배우 콜린 퍼스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직업에 대해 담백하게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은 공사장이든 회사든 다른 일을 했어도 열심히 했을 것이고, 지금 그보다 덜 힘든 일을 하면서 큰 보수를 받고 있으니 운이 좋다는 뉘앙스였다. 배우를 천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콜린 퍼스의 연기력에 감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꿈꿔온 혹은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남다른 운에 대한 인식과 겸손이다. 영국의 작가 닉혼비는 (이 연재의 1편에서 썼던 '런던스타일의 책일기'의 저자) 이렇게 썼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망하고 환호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이 꼭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직업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재능'이란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 생각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 초창기에는 별로 재능 없어 보이는 사람이 어느 사이엔가 훌쩍 성장해있기도 하고, 또 재능이 반짝하던 사람도 다른 자질이 받쳐주지 못해서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천직으로 알았던 일도 어느 순간 멀어질 수 있으며, 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준다면 그 일이야말로 나의 일일까.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그 일은 너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흔한 예로 큰돈을 번 스타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 역시도 '내 일'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나에게 경제적으로 벌어주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 일로 계속 끌려가는 경우가 혹시 더 '나의 일'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 일이 '나의 일'인지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때때로 사립탐정 필립 말로를 떠올린다.
필립 말로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페르소나이다. 사립 탐정이라는 직업을 어릴 적부터 꿈꿨다거나 큰 돈을 벌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은 없지만, 그에게 일이 찾아오는 방식이 한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삶에서 어떤 것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 보람 없는 하루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개. 모빌잣밤나무 열매를 찾지 못하고 있는 다람쥐. 언제나 기어를 잘못 조립하고 있는 직공.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작자들만 찾아오기 마련이다.
-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1953> 중에서, 레이몬드 챈들러
1. '아무 보람 없는 하루'를 알고 있는 사람.
그는 잠재적으로 일의 진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보람 없어 보이는 수많은 날들을 견디고 견뎌서 하나의 반짝임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환호하겠지만 그 이면의 지루한 날들은 잊히기 쉽다.
2. 주변의 비정상적인 작자들
어느 모로 보다 번듯하고 멀쩡한 사람들보다는 어쩐지 '비정상적인 작자'들이 주변에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일명 '또라이의 법칙'에 따르면) 나 자신이 '비정상'일 테니까.
필립 말로는 보통의 자신의 일과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사립탐정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이것이 전형적인 하루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례적인 하루라고도 할 수 없다. 왜 이런 일을 언제까지나 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돈이 많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즐거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먹으로 얻어터지기도 하고 저격당하기도 하고 유치장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있다. 살해당할 위험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제는 제정신으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안에 발을 씻고 착실한 작업으로 바꾸어보자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그럴 때면 도어벨의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통하는 문을 열면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고민과 불과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진 새로운 얼굴이 서 있다. "들어오십시오. 신가미 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확실히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나긴 이별> 중에서, 레이몬드 챈들러
3. 왜 이 일을 언제까지나 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미스터리를 받아들인다. 좋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위험이 없는 일도 아니며, 남들 보기에 착실한 일을 해야 할 듯한 의무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고민들 사이에 서성이고 있는 사이 또 나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줄 일이 도착한다. 어느새 그 일에 응하고 있다.
이런 사이클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가게 되는 것.
그 질문이 계속 찾아온다면 바로 나의 몫이고 나의 일이다.
혁오 -큰 새
https://www.youtube.com/watch?v=I7VdElwDcr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