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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Nov 04. 2024

극장을 떠난 이후의 빛

오래된 거리처럼 영화를 사랑하고

오래된 거리에 극장이 있었다.


서울에서도 낡고 허름한 골목 종로. 지금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그 골목에 씨네필들이 찾아오곤 했다. 이제는 실버영화관이 된 낙원상가의 꼭대기층에는 '허리우드 극장'이 있었다. 희뿌옇게 내려앉은 세월의 창가를 쓱쓱 닦아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면 극장으로 향하는 발자국이 보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선다. 멀티플렉스와 예매가 정착된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 때는 그랬다. 매표소에서 짧은 대화도 오고갔다. 우디 앨런의 초창기 영화 <애니홀Anni Hall, 1977 >에서 보듯 관객들은 극장에서 줄을 서서 영화를 기다린다. 그 사이에 여자를 꼬시려던 남자가 비평가 마샬 맥루한을 인용하자, 그 근처에 서 있던 실제 마샬 맥루한이 답답한 듯 한 마디하는 장면도 있다. "이 사람은 내 이론을 전혀 모르고 있네요!"


서 있는 동안만 해도 에피소드 몇 개는 쏟아질 듯한 시간에 친구들끼리의 수다가 오가고, 의식이라도 치르듯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빛은 없다. 영사기를 통해서 이어지는 한 줄기의 빛이 스크린으로 확장되고 객석의 총총한 눈빛들이 켜진다. 빛이 통과하는 그 길을 따라 소용돌이 치던 먼지처럼 내 주변을 떠돌고 있는 흩어진 생각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하는지 고민하는 배우지망생이 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어느 카페에서 노신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쳐다봐도 돼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라 사비 Vivre Sa Vie, 1997>에서 만난 그 질문은 좀 낯설었다. 젊은 여자가 노신사에게 쳐다봐도 되냐고 묻다니.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어색하지 않은 대화의 노크였다. 


언젠가 TV에서 프랑스에 오래 거주했다는 조승연 작가가 '파리의 스피릿(spirit)'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었다. 1900년대 초반에 파리에 몰려든 예술인들때문에 '카페 드 플로르'를 비롯한 유서깊은 카페들이 그곳의 자랑이지만, 그 문화의 진수는 카페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그 범상치 않은 질문은 표면을 겉돌 새도 없이 바로 내면을 겨눈다. 

안나 카리나가 연기한 나나의 고민은 그런 것이다. 말을 하고 싶은데, 뭔가 해보려고 하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정작 말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해야할텐데, 그게 되지 않는다.  


그 질문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미처 말해지지 못하는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 새로운 생각으로 이끌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도무지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에도 오가는 수많은 말들 속에 잡아둘만한 것들을 찾으려 애써봤지만, 무언가를 건졌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던 날들. 차라리 말을 걸지 않아더라면 실망도 없었겠지. 대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커다른 틈만 확인해버린 듯한 허탈감.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씁쓸해서 입맛이 쓰다. 허공 속에 흩날리는 말의 먼지들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리한 이들은 농담의 선수가 되거나 차라리 위악을 선택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 주인공 요조는 사람 사이 대화가 온전히 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차라리 거짓말로 환심을 사는 편을 택한다. 그는 거짓말의 천재가 된다. 진실로 사람을 대하는 대신 익살꾼으로 자신을 가장한다.


노신사는 젊은이의 고민을 살아왔다. 관객은 영화 속의 나나가 되어 답을 기다린다. 꼭 그 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도 같은 고민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같은 희망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설마, 이번에도 빗나가지는 않을까.


"말을 할수록 그 의미가 사라져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고 말을 나누지 않는다면 정말로 체념이 되어서 편안해질까. 상처받지 않겠다고 진공 상태만을 고집하며 자신을 가둔다면 무엇으로 숨을 쉬게 되나. 

노신사의 말은 다시 살아난다.


"말이라는 건 삶에 비하면 거의 부활같은 거예요. 말을 하지 않을 때와 다른 삶이에요. 말하기 위해선 말없는 삶의 죽음을 거쳐야 해요. 설명을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객관적으로 인생을 볼 수 있기 전까지는 말을 잘 하기가 힘들어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이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말 없는 삶의 죽음. 그것을 거친 이후에야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그것이 말의 부활이라고 전한다. 


극장 속의 빛이 모두 사라지고, 바깥으로 나오자 먼 하늘까지 노을이 번져있었다. 친구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저녁은 끝도 없이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 했다. 한 여름이었을까, 아니면 이른 오후에 본 영화였을까. 그 하늘 끝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여운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보이던 낙원아파트의 창가엔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마다 오렌지빛 이야기가 감돈다. 그 불빛 사이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그려본다.


요즘 11월의 따뜻한 날씨는 인디언써머를 떠올리게 한다. 따뜻한 한낮을 걸으며 문득 낙원상가 옥상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영화 속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극장에서 잔다르크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나나를 생각한다. 당구장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던 그녀를 바라본다. 극장은 그렇게 영화를 사러 가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어떤 삶을 살아가든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다. 

말의 죽음을 겪는 것조차도 부활을 위한 과정이다.

과녁에 도달한 화살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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