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가 거는 말
일요일 아침에 카페 가는 걸 좋아해요!
녹화 도중 아나운서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약간 들뜬 그 목소리가 카페의 기억을 불러낸다. 대개 아나운서들은 '얼리 버드'의 하루를 보낸다. 새벽 뉴스를 준비하려면 전날부터 일찍 자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요일 아침이란 모처럼 그 의무감에서 해방되는 날일 것이다. 조용히 스스로를 만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그 아침 카페의 테이블에 내려앉는다.
곤히 잠들어 있어도 뭐랄 사람 없는 조용한 휴일의 아침의 빛은 일하러 가는 날과는 좀 다르다. 붐비는 사람들이 지워진 거리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새의 소리, 도로 한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 간판이 켜지지 않은 가게, 흥청거리던 지난밤의 잔해가 흩어져있는 작은 술집들.
그 분위기를 기억 속의 사진처럼 선명히 보여준 그림을 떠올린다.
에드워드 호퍼의 <일요일의 이른 아침>은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을 담았다. 비어있는 단출한 거리의 2층 건물 앞에 보이는 소화전, 이발소 표시등. 그리고 짙은 태양의 그림자.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이 거리의 감정이 전해진다. 열렬한 웅변은 아니지만 침묵으로 말하는 듯한 고요. 이 도시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현재. 그러니까 지쳤던 일상의 피로와의 단절, 혹은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고독의 풍경일 수 있다.
아침의 빛을 구분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하다. 최고의 미각을 자랑하는 요리사들이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듯이, 빛의 감별사도 어디엔가 존재하지 않을까. 아침과 한낮 그리고 서서히 저무는 저녁의 빛을 시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멋진 일이다. 아마도 하루종일 밖에서 일하는 농부나, 작업자들 중에 많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은 코앞에 지나치는 것들도 보지 못할 때가 많으니.
빛을 써야 하는 또 다른 직업. 영화감독들에게도 빛의 감별사가 많을 수 있다. 언젠가 봤던 짐 자무쉬의 영화 <다운 바이 로 Down By Law, 1986>의 장면을 기억한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토스트와 커피를 먹는 식탁. 그 집에 쏟아지는 빛은 선명한 아침의 색이었다. 매일 받으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그 빛. 그렇게 신비스럽게 아침을 빛내고 있는 장면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일요일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얼리 버드와 거리가 먼 우리들은 정오가 지나서 만나고도 아침조차 먹지 않았다. 부스스한 얼굴을 차마 못 본 척해주며 첫 끼를 먹고 햇볕이 잘 드는 카페로 향했다.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카페의 표정은 날마다 달랐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긴 테이블이 있는 바 자리에 앉아서 아메리카노와 카눌레를 시켰었던 기억. 찻잔 속 작은 우물처럼 번지는 물결이 햇빛에 반짝인다. 커피 향이 번진다.
최근에 봤던 영화나 들었던 음악들, 대수롭지 않은 근황들, 그리고 때때로 주변의 깜짝 뉴스가 주요 화제로 등장했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것은 카페 한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에서였다.
벽면을 가득 메운 그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모작 혹은 오마주였다. <푸른 저녁 Soir Bleu, 1914>은 그가 32세에 프랑스에 건너갔을 때 그린 작품으로 카페 안의 사람들을 담고 있다. 노동자, 매춘부, 담배 피우는 예술가, 부르주아 남녀 등 호퍼가 파리에서 마주친 풍경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당시 뉴욕이 원하는 화풍과 맞지 않아 혹평을 받고는 다시 전시되지 않았다.
그 카페의 모작에는 좀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들, 부르주아 남녀는 비슷했지만, 피에로 분장을 한 예술가 대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분장을 한 인물이 있었고,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여성 대신 태권도 도복을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카페의 주인이 호퍼의 열렬한 팬이었나 보다. 자료를 찾아보니 사진이 남아있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을 살아간 어느 화가의 열정이 또 다른 변주곡으로 먼 나라의 작은 동네 카페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호퍼의 <푸른 저녁>은 그의 그림 사상 사람들이 최대 출연한 작품이라고 한다. 무려 7명.
그런데 다들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각자 자기가 할 일들을 하면서 함께 있는 풍경. 같이 있어도 각자의 생각을 담은 채 자신의 일부만 공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 버전이라면 각자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펼친 채 한 테이블에 있는 장면이 될 수 있을까.
호퍼의 젊은 날은 재즈시대를 지났다. 대공황과 인플레이션, 금주법이 요동치던 때였지만, 그는 도시 어느 모퉁이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화려할 것 없는 풍경인데도 시선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의 그림에서는 모란디와 샤르댕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어떤 고요함이 전해진다.
조금은 천천히 가고 싶은 발걸음.
사소하고 단순한 일상에 머무는 시선.
어느 시대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퍼가 거는 말에 답할 것이다.
그 언어는 세상 어디에나 변함없이 찾아오는 빛처럼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