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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식탁에서

눈부신 크리스털을 발견해 내는 일에 대하여

by 베리티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떡국 한 그릇 더 먹을수록 슬슬 겁이 난다. 돈키호테의 그 유명한 문장들은 계속 이어진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워 이기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세르반데스의 열정에 찌릿 감전될 만한 글이지만, 지금의 내가 인용해도 되는 것인가. 이 무슨 나약한 소리일까 싶지만 현실 토크에서 친구끼리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가능성은 점점 희소해진다. 우리 중 누군가가 모험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진심 어린 박수를 쳐줄 수 있을까. 그게 되겠어, 말리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씁쓸하지만 만류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뷔페를 그다지 즐기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씩 모임 식사 때 참석하기는 하지만 내가 잡는 약속을 뷔페로 하는 일은 드물다. 여러 접시를 즐기기보다 소박한 정량의 식사가 더 내게는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이다. 그렇다 해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음식들을 보는 기쁨에 예외는 없을 것이다.

뷔페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뷔페는 해적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8세기 경 노르만 바이킹들이 오랜 항해를 하면서 소금에 절인 저장 음식을 주로 먹다가, 육지에 다다르면 그동안 얻은 고기, 채소, 과일을 널빤지에 올려놓고 밤낮없이 골라 먹었다고 전한다. 약탈이라는 윤리는 조금 뒤로 하더라도 모험이 배어있는 식사법이긴 하다. 늘어놓은 널빤지 위해 해적들의 시간이 차려져 있다.


해적 이야기 중에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좋아한다. 플로리다 해변에 정박 중인 요트에 열아홉 소녀와 삼촌이 타고 있다. 소녀는 바람둥이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삼촌은 번듯한 신랑감을 소개해 주려 하지만 소녀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그러던 중 해적이 요트에 침략하고 소녀는 해적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부르주아 출신인 자신과 전혀 다른 배경의 해적에게 소녀는 점점 끌리게 되는데,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기막히다. 해적이 소녀 아디터에게 묻는다.

"당신이 만난 남자들 모두 당신에게 끌린다고 했소?"

"그러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나요? 인생이란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향해 나갔다가 물러서는 거죠."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형해 나갔다가 물러서는 것. 이보다 명확하게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해적이 슬쩍 떠보려고 혹은 스스로를 자각해 보라고 던진 말에 아디터는 전혀 굴하지 않는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같이 절벽을 기어오르고 다이빙을 하며 모험을 즐긴다. 해적의 만류에도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우기며 소녀는 경쾌하게 웃는다.


"나에게 용기란 인생에 내리는 지루한 회색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걸 의미하죠. 사람들이나 상황을 건너뛰고 더욱 황량한 인생까지 넘어서는 거요. 인생의 가치와 덧없는 것들의 가치를 우긴다고나 할까요?"

앞으로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는 소녀 아디터의 행동과 말들이 해적을 만나 반짝반짝 빛난다. 피츠제럴드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인생이 반짝거리고 시간은 유령 같고 그 힘은 영원한 그런 순간이었다.'


해적과 소녀의 모험은 그렇다 해도 떡국 많이 먹은 사람들은 생의 모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끊임없이 모험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생의 어느 구간을 넘어서면 원하든 아니든 모험이 찾아오긴 한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올 때 그것을 모험으로 받아들일지 그저 순응할지, 그것은 선택하는 사람의 몫이다.


몰입 연구의 대가 헝가리계 미국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형 모리츠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그의 형은 스위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어느 날 소련의 굴라크 수용소에 끌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생존했으나 굴라크의 생존자들은 이미 그 존재 자체로 수상쩍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 모리츠가 80세가 되어 미하이와 만났을 때 그는 기차역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모리츠는 크리스털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 반짝이는 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수집상을 만났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관련 행사에도 참석했다. 그의 집은 온통 크리스털로 가득한 박물관 같았고 크리스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특수조명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모리츠가 아이 주먹만 한 크리스털을 미하이에게 주며 그 돌의 틈과 결정, 균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하이는 알게 되었다. 그 돌들을 읽어냄으로써 형이 말년에 인생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은은하게 빛나는 크리스털을 함께 바라보면서 이제 그는 굴라크에서 굶어 죽을 뻔했던 형의 얼굴에서 몰입을 읽게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없는 폭풍 속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지점까지 도착했어도 모리츠는 불평하지 않았다. 80세가 되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들 속에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했고 빠져들었다. 그 빛나는 세계 속에서 그는 아이처럼 웃을 수 있었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읽은 이 일화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광고 크리에이터 박웅현은 저서 <해적의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창의성은 발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전한다. 결국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는 사무실 벽 해골 이미지 옆에 이런 글을 붙여놓았다.

'We go bold or go home'


이따금씩 뷔페를 대할 때면 해적을 떠올린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에 유효기간은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반짝이는 크리스털을 찾아내는 태도,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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