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와 리스본행 야간열차
기차 여행을 한 지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웬만한 거리는 차로 움직이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래도 기차를 탈 일이 있으면 어쩐지 조금 들뜨게 된다. 여행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일이었다. 울산행 KTX를 예매했다. 열차 시간보다 여유 있게 일찍 나왔는데 택시가 안 잡힐 줄은 몰랐다. 한창 출근시간이어서인지 택시앱에 뜨는 차가 없었다. 이런 적이 없어서 당황하다가 시간만 가고 결국 버스를 탔다. 택시보다 버스가 빠를 때가 있다. 겨우 한숨 돌렸다.
서울역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가득하다. 옅은 아침 햇살이 천정 가까이 유리창 너머 번져온다. 온실처럼 따사로운 실내다. 햇볕을 오래 받아 오후쯤 되면 창유리는 꽤 따뜻할 테니 손을 대보면 뜨거울까. 그러기엔 천정 가까이 높아서 어림없지만. 플랫폼이 울리도록 뛴다. 아슬아슬하게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막 출발할 때 점프하다시피 해서 올라타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에서 한 남자가 멈추라고 외치며 기차를 쫓아간다. 물론 기관사가 들을 리 없다. 날렵한 동작으로 먼저 여행가방을 들어 올려 열차 끄트머리에 간신히 올라탄다. 기차에 올라 살짝 몸을 트는 그 리듬을 언제나 좋아했다. 사실 먼저 좇아가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먼저 쫓아갔다고 해서 먼저 타라는 법은 없다. 잊기 쉽지만 종종 일어나는 현실을 일깨운다. 탑승자의 여유로운 시선과 함께 그 여행이 시작되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계속 일 연락이 오는 날이었다. 좌석 앞의 선반을 펼치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투덕투덕 자판을 두드리고 있자니 누군가 비행기에서 작업할 때 일이 가장 잘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기차도 비슷한 것 같다. 상대성원리의 작용일까. 움직일 때 느껴지는 속도감 때문일까. 내가 있는 공간이 빠르게 달리고 있다는 감각이 손끝에도 영향을 주는 것일까. 빠르게 몰입이 되어서 예정보다 일찍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일에 쫓기던 마음이 이제 누그러진다.
가끔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리는 상상을 한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교사 그레고리우스처럼 선생님이 갑자기 떠나셨다는 학생들의 말만 텅 빈 교탁에 남겨진다. 시곗바늘처럼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살았어야 할 삶을 향해 자신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30년 동안 한 치의 실수도 비난받을 일도 한 적 없던 사람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는 이미 기차에 올랐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일상을 탈출하는 여행에 기차가 적격인 이유가 드러난다. 기차가 출발할 때 들리는 그 소리, 덜컹임은 중단되었던 삶이 나아가고 있다는 은유가 된다. 그 소리가 공간을 울리면서 탑승자의 심장까지 통과해 나간다. 눈앞의 풍경은 계속 달라지고 중요했던 온갖 약속들이 아득해진다.
순간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지나온 30년은 오직 이 시간을 위해 준비되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턱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넘치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내와 결혼해서 함께 곰스크로 가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는 점점 기차에 오르는 것을 미루게 된다. 필요한 것들도 채워지고 안락함도 있는데 굳이 꼭 거기를 가야 하는 것일까. 표를 살 수 있는 돈보다 이미 더 벌었지만 아내는 더 이상 곰스크로 가려하지 않는다. 기차가 코앞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기차를 타고나서도 임신 핑계를 대며 내리고, 남자도 안정적 직업을 얻게 되면서 정착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항상 곰스크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지는 못 한다.
'언젠가 곰스크로 떠나리라는 것은 내 성장기에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내 삶은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당시에 곰스크에 걸었던 희망을 나는 다 잊어버렸다. 곰스크로 가려했던 이유조차도 희미해져 더 이상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곰스크를 향한 열망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는 그 도시에 도착한다는 명백한 확신이 시들해진 것뿐이었다.'
곰스크에 도착하기까지 지금은 어느 정도 와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처럼 곰스크에 가지 못한다. 표가 없어서도 아니고, 포기해서도 아니다. 열정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도착을 기대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곰스크에 도착해서 마주하게 될 것들을 미리 두려워해서는 아닐까. 과연 기대했던 그 곰스크가 아니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돌아오는 열차에서도 일 전화가 계속 울렸다. 울산에 오느라 참석하지 못한 회의들을 전달받으며 초조해진다. 이쪽 일정 대신 회의에 참석해야 했었을까. 하나의 일이 끝났다고 안도했는데 이렇게 복잡해질 줄이야. 꼬이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 대책들을 떠올려 보다가 슬쩍 잠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졌다. 서울역 앞에 우뚝 서 있는 서울스퀘어 빌딩에 알록달록 빛들이 들어와 있다. 굽이 굽이 승강장을 따라 밤거리를 걷는다. 집에 도착해서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또 전화가 울린다.
일이 해결되었다. 그럴 때가 있다. 내가 뭔가 해보려고 바둥거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알아서 정리가 된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내가 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느슨해질 필요도 있다는 것을 배운다.
아주 짧은 한 나절 동안의 기차 여행. 출발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었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에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이제 어느 기차를 타야 할까.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 중에서
The Kinks -This Time Tomorrow
https://www.youtube.com/watch?v=RcjmyNXtD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