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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종묘

수평으로 이루어진 소멸의 세계

by 베리티 Jan 23. 2025

아는 얼굴 다 모였네 여기에.


무대 조명 아래 선글라스가 번쩍인다. 악뮤에서 솔로 데뷔한 이찬혁의 노래 '장례희망'의 가사이다. 이미 시작부터 죽음 이후의 세계이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맞게 된 죽음을 상상하는 젊은이가 노래를 한다. 우울하고 비통한 장례식이 아니라 환호성 가득한 파티 같은 자리. 아이처럼 신이 나서 춤추다가 기꺼이 관속으로 가볍게 들어간다. 그가 이런 죽음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는 천국에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살아갈 날이 더 많은 20대에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이 쉬운가. 죽음에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언젠가 묘지에 갔다가 놀란 것은 노인이 되어 묻힌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 예상하지만 십 대나 이십 대의 묘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영원히 과거형이 되어버린 지인들의 소식을 듣게 되는 사건들을 이따금씩 겪게 된다.   

그럼에도 어쩐지 피하게 된다. 한 번쯤 유서를 미리 써보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도 실천이 쉽지 않다. 어쩌다 가게 된 장례식에서는 유족들을 위로하지만, 일상 얘기로 돌아와 가급적 슬픔을 잊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정물화 사이 보이는 해골과 모래시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보이던 바니타스 미술은 일상적 사물 사이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풍성한 과일들, 동전, 꽃, 월계관, 포도주병 등으로 세속적 영광을 보여주다가 두개골과 모래시계로 시선이 향하면 삶의 유한성과 덧없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 정물들은 '메멘토 모리(Memen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앨랭드보통은 죽음이 눈앞에 급급한 일들로부터 중요한 것들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고 지적한다.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삶의 본질로 향하게 된다. 유한하기 때문에 먼저 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한번 가볼 만한 곳이 종로에 있다. 유명 외국인 건축가가 한국에 올 때면 온 가족을 데리고 꼭 찾는다는 그곳. 한 번으로도 모자라 일부러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눈이 쌓인 마당을 푹푹 걸으며 눈 덮인 지붕을 바라보기 위해 건축가의 아들 손자며느리가 그곳을 찾는다. 서울의 이름난 궁도 아니고,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도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별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어서 몇 번이고 스쳐갔을 것이다. 그곳은 바로 종묘다.

빌바오 구겐하임 건축으로 알려진 프랑크 게리는 이처럼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며 감탄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거론하며 말하기를 '스트롱'하고 '심플'하지만 미니멀리즘은 아니라고 표현했다. 굉장히 호기심이 가는 얘기다. 


유홍준 교수님의 종묘 얘기를 듣고 겨울에 가야지 벼르고 있었다. 몇 년 전인가 갑자기 그날의 일정이 취소되어 빈 날이 있었는데, 눈이 무지막지하게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이런 타이밍을 놓칠 수 없지 하다가 종묘를 떠올렸다. 늦은 아침 종묘 앞에서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벌써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으니, 왕가의 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394년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짓기 시작해서 왕위가 계승되면서 점점 옆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등 전쟁에 불에 타기도 하고 수난을 겪어왔지만 복구하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발에 잔뜩 힘을 주고 눈 쌓인 길을 푹푹 발자국을 내어 걷기가 만만치는 않았지만 돌담과 지붕을 보자 어딘가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종묘가 그렇게 마당이 넓은 공간이었는지 몰랐다. 

한 폭의 동양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눈 쌓인 소나무들과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니 입구의 연못에는 까치가 통통 뛰놀고 있었다. 신이 다닌다는 길을 따라 꽤 걸어야 정전에 도착하게 된다. 한 바퀴를 천천히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제사를 준비하는 여러 집들을 지나 걷다 보니 드디어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설렘을 안고 문턱을 넘었을 때 숨을 한번 고르게 된다.  


카메라의 앵글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의 수평의 세계가 눈앞에 있었다. 점점 더 높이 위로 솟아가는 현대의 빌딩들 사이에서 이렇게 단아하게 한 층으로 정렬된 건축물을 본다는 것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분명 지금은 현재가 분명한데. 역사가 지나온 자취를 이렇게 요란하지 않게 드러낼 수 있는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감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게 되는 어떤 엄숙함이 있었다. 

죽음이 스며있는 건물. 이 세상과 죽음과의 대화. 건물 전체가 눈을 감고 있는 표정 같다고 할까. 

극도로 절제하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을 지키고 있는 듯한 기운. 위엄은 현란한 꾸밈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이토록 감동을 주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건축가의 답은 이렇다.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한 공간을 만든 것은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종묘 제례는 음악, 무용, 건축 등 종합적 예술이 어우러진 의식이다. 문화혁명으로 종묘제례를 잃은 중국은 우리의 종묘제례를 배워갔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건축가들이 말하는 정전의 아름다움은 특히 월대에 이르면 배가된다. 그날은 눈이 덮여있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른 가슴 높이에 이르는 돌에 올라야 정전으로 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월대는 거칠게 다듬지 않는 돌들-박석이 깔려있는데, 이것이 종묘 건축의 진수라고 한다. 바닥에 거친 돌을 사용한 것은 경박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차분해진다. 신분인 가진 것이 달라도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 태도가 박석을 깔아놓은 선조들의 지혜를 만나 공간으로 탄생한다. 이곳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건축의 디테일이 놀라웠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게 경사를 이룬 것은 비 오는 날 물이 고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비가 내릴 때 박석 위에 물이 찰랑거리는 모습도 볼거리라고 했다. 빗물이 찰랑거리는 박석이 있는 여름의 종묘는 또 다를 것이다.


흔히 과거의 기술이 축적되어 온 현대의 지식으로 못 해낼 것이 없는 듯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 건축에 담긴 이런 태도까지 다시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기 쉽지 않다. 기술과 지식이 최고에 이른다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문화재 복구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닌가.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일상 한가운데 죽음을 돌아보는 건축물이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흔한 묘지의 모습을 하지 않고 엄숙하고 품격 있게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유구한 세월 속에서 그저 매일매일 다채롭게 변해가는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죽음을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소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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