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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

벳푸의 작은 음악바에서 마주친 것들

by 베리티

이렇게 얼음장처럼 추운 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


이를테면 활화산의 분화구 같은 것.

언젠가 후쿠오카 어느 화산의 꼭대기에 올라 유황냄새를 맡으며 끝도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명하게 푸른 하늘 아래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스산하고도 미스터리한 신비를 내뿜고 있었다.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그곳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그 구덩이를 계속 깊이 내려가다 보면 용암이 이글대며 끓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건드리지 마. 그렇게 말하는 괴물의 콧김처럼.

그렇게 뜨거울 텐데 물빛은 또 옥빛처럼 파랬다. 누군가는 온천을 즐기고 또 화산 근처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밭을 일구고 있다. 근처에서 젖소들은 풀을 뜯는다. 세상에 모험 아닌 일들이 어디 하나라도 있느냐고 묻는 듯 그 뜨거운 불구덩이 가까이에서도 평화롭고도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후쿠오카의 벳푸는 제대로 조사도 못 하고 도착한 곳이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가족여행을 따라와서 아는 게 없었다. 여행 준비 시간이 부족하여 느슨한 패키지가 예약되었고 이번 여행 준비에 내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준비해 준 손길에 감사하며 잘 따라다니리라 결심했다. 처음 해보는 패키지여행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정된 코스대로 버스에 오르고 떨구기를 하루종일 반복할 무렵, 슬슬 이런 게 여행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날 즈음 무언가 빠졌다는 느낌에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

해가 지고 가족들이 료칸에서 온천으로 피로를 풀고 있을 때 결국 탈출을 감행했다. 드디어 예정에 없던 코스가 열린 것이다.


정보라고는 없었지만 우르르 다니지 않는 게 우선 너무 좋았다. 관광지가 아니라 보통의 일상적 거리들이 있어서 그 역시 마음에 들었다. 낮에 가이드가 근처 벳푸 거리를 한번 가봐도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 거리를 따라 걸었다. 이미 다 큰 어른이었지만 우리는 가출이라도 한 아이들처럼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멀어졌는데 이제야 일본에 다가서는 기분이었다. 단정한 화단이 있는 일본식 집들, 하늘 아래 가지런한 지붕의 상가건물. 한적한 건널목을 건너고 지하도를 지나고 있을 때 지잉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십 대 소년들 네댓 명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제대로 길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음악이 있어야 동네지.'

들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도 상관하지 않고 세상을 뚫고 나갈 듯한 풋풋한 소리였다. 반가워서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는데 괜히 애들 방해하지 말라며 잡아끄는 바람에 그냥 떠나야 했다. 남편은 아마도 가출 기분 내는 다 큰 어른이 창피했던 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해볼걸.


존 버저의 소설에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그는 우리가 함께 라면 세상의 어느 도시에서도 음악을 찾아낼 수 있으니라고 믿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 문장을 읽으며 존 버저가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상 어느 도시에서도 음악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사람. 이 얼마나 두근거리는 표현인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늘 그런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처음 가는 도시에선 음악을 찾아내야 한다. 누군가는 명소일지, 맛집일지, 건축물일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이미 버스킹부터 마주쳤으니 좋은 시작이다. 발걸음이 아이처럼 사뿐하다.


좀 더 걸으니 '외국인거리'라는 곳이 보였다. 좁다란 시장통을 따라 걸으니 아기자기한 케이크가게, 꽃가게들이 즐비하다. 심야식당처럼 고즈넉한 가게에서부터 사람들이 복작대는 라멘집을 기웃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디를 들어가 볼까 고심하는데 스쿠터를 타고 온 한 청년이 목재 문이 있는 곳 앞에 내린다. 가게 문을 이제 여는 것 같은데 바로 들어가긴 그렇다. 조금 더 가자니, 길모퉁이에 작은 바가 보인다. 비스듬히 창 너머를 바라보니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다. 실내 분위기를 보니 록음악 취향인 듯했다. 더 볼 것 없이 우리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오아시스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왔다. 가게 안쪽 바에 자리 잡았다.

벽에 일본 밴드들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옆 책장에는 록에 대한 책들이 꽂혀있었다. 바 너머로 주인장이 바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화에 나올 법한 성실해 보이는 주인이 일본어판 메뉴판을 건넨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다시 영어판 메뉴를 바꿔준다. 아사히 맥주와 토마토구이를 시켰다. 갑자기 주인장 눈이 땡그래졌다. '토마토'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잠시 어색한 침묵이 오가고 뭔가 떠오른 듯 남편이 말한다. '도마도'

그러자 환하게 웃는 표정이 된다.

그렇다. 여기는 일본이다. 토마토 안 통한다, 도마도.


록음악바답게 좋아하는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브릿팝 위주의 선곡. 달큼하게 구운 토마토구이를 먹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가출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졌다. 리듬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는 가사는 조금 따라 불렀더니 주인이 힐끗 쳐다본다. 주인에게 근처에 밴드들을 볼 수 있는 클럽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갑자기 바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나는 널 알아. 말하자면 진짜 통성명을 한 셈이다. 주인장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10분 거리 내에 라이브 클럽이 있다고 했다. 그 정보만으로도 고마운데 옆에 있던 알바가 두꺼운 전화번호부 같은 책을 들고 왔다. 주인은 페이지를 넘기더니 전화까지 걸어주는 것이었다. 전화 걸어서 확인까지. 감동의 물결이었다.

아쉽게도 그날 공연이 없다는 소식에 미안해 하던 주인장 표정이 떠오른다. 우리는 괜찮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제야 어디 출신인지 묻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이 잘 안 오는 곳이었을까.

떠들썩한 시간이 무르익어 가는 사이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가게 안이 온통 깜깜해졌다. 주인장은 서둘러서 양초를 꺼내서 밝혔는데, 오히려 촛불이 흔들리는 분위기가 음악에 더 맞는 것도 같았다. 벽에 어른 거리는 사람들 머리 그림자를 타고 기타 소리는 바안으로 가득 번져갔다. 여행자를 위한 이벤트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듣다가 자정 무렵 아쉽게도 일어나야 했다. 아침이면 공항 갈 준비를 해야하니까. 주인에게 좋은 시간이었다며 인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인기척이 있어서 뒤돌아보니 주인장이 문 앞까지 따라서 마중 나온 것이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친절에 멍해질 지경이었다. 속은 어떨지 모를 지언정 일본 사람들이 친절한 것이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날의 친절은 일본인이어서가 아니라 음악을 안다는 반가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뒤돌아서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바를 바라보았다.


때로 우리는 가게 될지 예상도 못했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 길을 벗어나야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그 도시의 이름을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벳푸를 떠올리면 모퉁이를 지키고 있던 친절한 주인장의 그 음악바가 떠오른다. 어떤 밤에는 그 가게로 인해 벳푸가 그리워진다.


어디에 있든 음악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도시를 기억할 수 있다.


Pavement - Black out

https://www.youtube.com/watch?v=LjWoeq2-2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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