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24 댓글 25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한낮의 동네 책방엔 이야기가 있다

차고 모양의 작은 책방에서 보낸 오후

by 베리티 Feb 06. 2025

고양이가 집을 나갔어.


길을 가다가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었다. 자세한 사연은 다 듣지 못했지만, 또렷한 결말이 들려왔다. "결국, 세상이 궁금했던 거지 뭐."

픽 웃음이 났다. 고양이의 마음을 사람이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이유를. 꼭 나갈 일이 있는 것이 아니어도 굳이 두터운 옷을 껴입고 어디론가 가게 된다. 다행히도 그 고양이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온다. 어딘가를 걷고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도착하려고 나가는 것이다.


평소에 봐두었던 동네책방에 들렀다. 심플해 보이는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바쁠 때는 좀처럼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을 하나 마감했으니 조금 여유도 있다. 

"구경해도 되나요?"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검은 롱코트에 수염을 기른 홀쭉한 주인인 듯한 남자와 또래 여자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시라는 대답을 듣고 책장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음악전문서점이라 뮤지션들의 에세이, 평론집, 소설들이 보였고, 한쪽에는 LP, CD들이 서 있고 테이프도 조그맣게 누워있었다. 공간의 중앙에 큰 소셜 테이블이 있어서 주인들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음반들은 주로 인디 뮤지션들의 것이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남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재명의 음반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음반은 없고 대신 그분의 다른 앨범이 있다고 했다. 한번 들어보겠냐며 오디오에 CD를 넣었다. 종종 가던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들을 수 있냐고 요청을 먼저 하기는 했어도, 이렇게 먼저 틀어주는 곳은 또 처음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라이너노트를 읽고 있었다. 공간이 작아서 울림도 좋고 목소리가 더 섬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졸졸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따사로운 햇살에 음악에 커피 향까지 번지니 처음 온 장소 같지가 않았다.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롱코트 수염 주인이 권하기에 감사하다고 했다. 

"장사는 됐고... 여기 와서 같이 얘기나 하세요."

장사는 됐고. 아, 이 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묘하게 좁혀주는 한 마디. 내가 이 책방에 끌렸던 하나의 단서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쩐 일인지 장사를 맹렬하게 하지 않는 가게에 끌리곤 한다. 이것은 왜라는 이유가 없고 굳이 말하자면 그냥 그렇다. 합리적인 이유 따위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큰 테이블에는 제주에서 보내왔다는 귤바구니와 갓 내린 커피잔이 차려졌다. 같이 앉아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롱코트 주인은 자기 의자 밑에 뭔가를 따로 두고 마시고 있었다. 슬쩍 보니 막걸리병이었다. 혼자서만 낮술을? 놀라긴 했지만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커피와 귤과 때때로 막걸리 한 모금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인은 어느 음반사 대표였고, 이 서점은 그 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책방은 주택의 차고 자리를 개조했고, 그 옆엔 작은 마당도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주택에 회사가 있다. 공연 기획, 레이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회사였다. 얘기하다 보니 손님이 더 들어와서 어느새 네 명이 자리하게 되었다. 

새로 합류한 한 분은 재즈공연 일을 한다고 했다. CD는 어느새 재즈 음반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그는 때때로 퀴즈를 던졌다. "이거, 어느 나라 음악 같아요?" 

나는 속으로 북유럽 스타일 아닌가 했는데 롱코트 주인장이 바로 답한다. "북유럽이지, 북유럽." 나에게도 묻는 시선이 오길래 얼떨결에 노르웨이? 했더니 정답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이탈리아는 또 그 특유의 따뜻한 멜로디가 있어요. 나라마다 각 스타일이 다 있죠. 그리고 또 묻는다. 우리나라는 어떤 스타일 같아요?

롱코트 주인의 고민은 요즘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음반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은 듯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콩 볶듯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 재즈 공연 일하는 분은 요즘 원두 볶는 재미에 빠졌다는 얘기를 했다. 커피 마니아인 것 같았는데 그저 드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섬세하게 볶는데 집중하다 결국 집에서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마지막 단계였다. 마치 댄스의 끝판왕이 탱고인 것처럼. 나는 그냥 프라이팬에 생두 볶는 상상을 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한 시간 즈음 수다가 오갔을까. 커피가 모두 식었을 무렵, 나는 CD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노을이 져서 황금빛이 가게 안으로 쏟아졌다. 계산을 하려고 들고 가니 롱코트 주인이 놀란다. "이거 사주시는 거예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 회사에서 제작한 음반이라며 직접 추천해 주신 두 곡을 오디오로 듣기까지 했다. 이제는 정말 나와야 할 때다. 여섯 평 남짓한 그 작은 책방이 들려준 이야기는 스냅사진처럼 남아있다. 그건 장사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년 전 그 책방은 이사를 갔다. 이제 창고 자리는 아니겠지만 또 다른 이야기들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고 그 책방 자리를 지나칠 때면 떠올리곤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벼락 아래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늘을 벗어나 양지바른 쪽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놀고 있었다. 괜히 방해가 될까 봐 안 보는 척하면서 지나쳤다. 

혹시, 아까 그 집 나갔다는 고양이는 아니겠지.



    


 


이전 27화 그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