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CD를 들을 때 하는 이야기들
검은 레코드판이 소용돌이처럼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전시에서 본 작품이다. Queen의 Around the world 앨범이었나.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이미지가 세상은 돌고 돈다는 은유처럼 보이도록 한 작가의 위트에 픽 웃음이 났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게 맞다. 부모님 시절의 음악 듣기 방식이 다시 돌고 돌아 지금 현재를 풍미하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핫한 취미 중 하나는 LP를 모으는 것이다. 힙한 동네가 되려면 레코드숍 한두 군데쯤은 있어야 한다.
어느덧 LP는 레코드가게의 상징이 되었다. 큼지막한 아트워크가 있는 판을 한쪽 팔 가득 안는다. 작품이라도 소장한 것처럼 뿌듯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레코드판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살 수 있는 미술작품이다. 실제로 앨범커버는 대부분 아티스트들의 작업으로 이루어지고, 벽에 세워두기만 해도 그럴듯하다. LP 바에서는 플레이하고 있는 판을 우뚝 세워서 보여준다. 명예의 전당이 따로 없다.
검고 둥근 그 판에 가늘게 파인 홈 위로 바늘을 올려놓을 때 시작되는 소리의 설렘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릴 적엔 원래 그런 줄 알았던 그 지지직거리는 잡음마저도 LP만의 매력이 되었다. 오래된 필름의 스크래치를 보는 것처럼 아득한 정서가 안개처럼 피어난다. 몇 번인가 LP 바에서 좋은 스피커로 알던 노래를 듣다가도 감탄할 때가 있었다. 그 잡음이 이렇게 황홀한 것이었나. 아름다움은 결점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으로 완성된다는 말을 실감한다.
관리하기 까다롭다는 점 말고도 LP의 아쉬움 중 하나는 휴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스트리밍으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은 그런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워크맨 시대엔 꽤나 진지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CD였다.
요즘에도 워크맨을 좋아하는 애들이 있다고 들었다. 재작년에 만난 한 대학생이 자기도 CD를 주로 사는데 테이프 워크맨이 탐난다는 얘기를 했다. CD 들어가는 워크맨이 있다고 하니 깜짝 놀란다. "CD도 워크맨이 있어요?" 그렇다고 알려주자 눈빛을 번뜩이며 바로 당근으로 들어간다.
요즘 레코드가게엔 LP와 더불어 작고 귀여운 테이프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요즘 세대들도 테이프를 만져보게 하고, 턴테이블에 손을 올리는 경험을 하게 해 주면 그들도 물성의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피지컬 음반'. 얼마 전 기사에서는 그렇게 표현하는 단어를 한참 바라보았다.
"CD가 제일 어정쩡해." 친구들끼리 떠들다가 나온 얘기이다. 큼직한 LP나 아기자기한 테이프도 아니고, 중간 사이즈의 CD는 레코드가게에서도 어쩐지 뒷전인 것 같다. "CD로 사실 거예요?" 가게 주인이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지만, LP에 비해 많이 들이지 않으니 없을 때도 많다.
오랫동안 CD로 음악을 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CD로 구매해서 통째로 앨범을 플레이하는 것을 뜻한다. 그다지 얼리 어댑터이지 못한 나는 꽤 오랫동안 CDP를 가지고 다녔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CD를 갈아 끼우려고 워크맨 열자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던 기억도 난다.
"어머, 그런 거 어디서 사는 거예요?"
꼭 그 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스트리밍 사이트를 들어가고 여러 앱으로 음악을 편하게 듣는다. 그렇지만 좋은 곡을 들으면 꼭 앨범을 사고 싶어진다. 편하게 아무렇게나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이 있는 것이다.
영화 <원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겠지만, CD 시절의 풍경이 소박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주인공이 늦은 밤 시디플레이어의 배터리를 사려고 동네 거리를 다니는 장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느슨한 발걸음으로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가 만났던 음악의 순간들이 빛나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bDz9P0i0BU
언젠가 록페스티벌에서 이 영화를 심야에 상영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한낮의 열기가 미처 다 식지 못한 여름밤에 야외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스크린의 빛 속에서 음악을 듣기에 이 보다 좋은 영화는 없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수만 가지의 방법이 있다. 쉽게 듣는다고 흔한 것이 아니고 어렵게 구해서 듣는다고 대단한 것도 아니다. 문명의 편리를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다. 각자의 방식대로,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있는 선택지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하지만 터치 한 번에도 버튼 하나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태도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때때로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확실히 영향을 미친다.' 윈델 베리의 말이 메아리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