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하여
늦은 겨울밤, 친구 하나가 퇴근해서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잠든 이야기를 꺼냈다. 머릿속으로는 잠깐 쉬고 일어나 옷을 벗어 제 자리에 걸고 씻고 메이크업도 지우고 잠자리에 드는 시뮬레이션을 하는데, 어느새 깨어보면 아침이다. 그때의 허망함과 엉망이 된 기분에 대해 떠들었다. 사회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알기 시작했던 것일까. 몸이 집에 와 있어도 정신은 회사 어디엔가 두고 왔을까.
돌아보면 학창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험기간이면 책상에 엎드려서 눈을 붙이곤 했다. 10분을 자더라고 깔끔하게 누워서 자고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는 것이 백번 낫다는 걸 안다. 그런데 또 엎드린다. 아마 누우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듯한 두려움이었을까.
한 친구는 또 이런 얘기를 한다. 졸업한 지 까마득한데도 여전히 교실에서 시험 보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같이 듣던 이들이 한 마디씩 한다. 나도 그런데. 나도!
다들 놀란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느껴야 할까.
우리의 잠재의식 어느 구석에는 불안이 잠들어있다. 어른이 되고, 가장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짐으로 불어난다. 정체를 알 수도 없는 모호하고도 사라지지 않는 그 감정이 때때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조금 슬픈 형태를 하고.
<변신>에 등장하는 고레고르의 아버지 역시 아무 일도 아닌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아집으로 아버지는 집에서도 자신의 사환 제복을 벗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잠옷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반면 아버지는 옷을 다 차려입은 채 자기 자리에서 졸았다. 마치 언제나 일할 준비가 되어 있고 여기서도 상사의 음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처음부터 새 옷 같지 않았던 제복이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온갖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청결함을 잃어 여기저기 얼룩이 지고 언제나 닦여있는 금단추로 빛나는 옷, 그 옷에 감싸여 늙은 잠자 씨가 지극히 불편하게, 그러면서도 고요히 자는 모습을 그레고르는 자주 저녁 내내 보았다.
- <변신>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수성가한 유대인으로 독선적이고 지배적인 태도로 가족 위에 군림하려 했다. 섬세하고 여린 성품의 아들과의 대립은 불 보듯 뻔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험한 말로 윽박지르고 수치심을 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언젠가 카프카가 아버지의 막말에 대해 느꼈던 수치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를테면 유태인 배우 뢰비처럼 순진하고 어린애 같은 사람까지도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인품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저는 잊어버렸습니다만- 무서운 어조로 그를 독충이 비유하셨습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버님은 언젠 으레 개나 벼룩에 대한 속담을 들고 나오셨습니다.... 언제나 저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버님 자신의 말이나 판단이 제게 얼마만큼의 고통과 수치심을 주었는가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이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카프카의 개인적 일화이지만 요즘세대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Gen Z니 알파세대이니 따지지 않아도 젊은 세대들이 공정에 민감하다는 것은 새로운 뉴스처럼 보도되지만 사실 지금의 할아버지도 그 옛날 청춘시절에는 그런 감수성을 가졌고, 뻔뻔하고 무던해진 어른의 태도에 반기를 들어왔다. 왜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 젊음이다.
카프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모욕적인 아버지의 언사뿐 아니라, 그 자체를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누군가에게 수치심이 된다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이 벌레인 것은 카프카가 평소 아버지가 자주 쓰는 말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 보인다. 그렇게 충격적인 폭언이지만 또 소설의 주인공을 벌레로 설정한 카프카의 발상이 흥미롭다. 그리고 온갖 매력덩어리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른 소설들보다 끌림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아버지가 정해준 진로를 따라 학교를 가고 번듯한 사회인이 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글을 쓴다니 그런 날벼락이 또 없다.
아버지 생각은 대체로 이런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열심히 일했다. 자식들을 위해서 특히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 덕으로 너는 호화롭게 방종한 삶을 살아왔다. 무슨 일이든지 네가 배우고 싶은 대로 공부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감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자식들의 효도'라는 말은 알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무엇인가 고마워하는 마음이나 동감의 표시는 있어야 할 터인데, 너는 그 대신에 도리어 나로부터 도망쳐서 너의 방으로, 너의 책의 세계로, 미친놈들 같은 친구에게로, 당치도 않은 공상의 나라로 가 버렸다. 너는 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 카프카
미친놈들 같은 친구, 당치도 않은 공상의 나라. 아버지에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였다. 다음 문장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정말 아버지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원래 대화가 통화지 않으니까 하고 넘겨버리면 괜찮은 것일까. 문득 돌아보니 입이 쓰다.
아버지는 그렇게 평생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였지만, 펄펄 끓는 저항이나 혁명 같은 깃발을 올린 것이 아니었다. 카프카는 그렇게 행동하기엔 생각이 많았다. 아버지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동시에 키워주고 돌본 정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나와 따로 방을 얻어 독립했지만 여동생 오틀라에게도 이 점을 잊지 않도록 강조했다.
아버지는 배고픔의 시련과 궁핍의 시련, 어쩌면 질병의 시련 이외의 다른 시련은 모르셔. 분명히 강력한 이런 시련들은 우리가 아직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것을 금할 권리가 아버지에게 생기는 거야. 여기에 진실이 있어. 그것은 진실하며 선한 것이기도 해.
우리가 배고픔과 돈 걱정에 쫓길 때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한,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당혹감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아버지 뜻대로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야 해. 이 점에서 아버지는 단순한 아버지 이상의 존재, 단순히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이상의 존재야.
-오틀라에게 보내는 편지 프라하, 1917.12.30.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강하게 표출한 드라마틱한 스토리였다면 더 큰 흥행을 보장하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잊지 못할 충격을 주었던 고전,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왕>처럼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아버지 이상의 존재'를 생각했던 카프카는 다르게 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이 부조리 속에서 벌레는 그저 뱅글뱅글 아버지 주변을 맴돌고만 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서 달아났다가, 아버지가 멈추면 멈추고, 아버지가 움직이면 다시 앞으로 달렸다. 그렇게 하여 부자는 방을 몇 바퀴 돌았다. 아무런 결정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모든 일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됨으로써 쫓고 쫓긴다는 인상도 주지 않은 채.
- <변신> 중에서, 카프카
'아무런 결정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라는 문장에서 먹먹해진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부쳐지지 못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제복을 입은 채로 고요하게 잠든 모습을 저녁 내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