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가 되어버린 피아노(2/3)

들리지 않는 것에 거대한 진실이 있다.

by 베리티

(지난 글에 이어집니다)


"악기는 그냥 방에 두기만 해도 멋진 장식이 된다."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연주가 지나간 과거가 되었거나 한 때의 꿈으로 남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음악을 꿈꾸는 학생들의 마음엔 불을 붙이는 한마디가 될 것이다.


고딕 스타일 뾰족한 첨탑의 고성 맨 꼭대기층에 아무도 모르는 방이 있다. 그 방은 에릭 사티가 1898년부터 27년 동안 머물던 파리의 아르쾨유(Arcueil)의 '콰트르 슈맹(Quatre Chemins)' 다락방을 닮았다. 몽마르트르에서도 60km 떨어져 있는 외곽지역이었고, 산업지대로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가난한 피아니스트 사티는 그곳에서 걸어서 -잠깐, 걷는다고? 60킬로를?!-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검은 고양이'까지 출퇴근했다. 몽마르트르에 도착하면 장차 피카소나 모딜리아니가 거주하게 될 세탁선(Bateau-Lavoir)을 지나쳤고 몽파르나스의 카페까지 걷기도 했다. 사티는 머릿속으로 곡을 쓴다는 얘기를 자주 했는데 이 길고 긴 산책이 그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4. 룸넘버 0번.

그 성이 호텔은 아니지만, 에드거 앨런 포와 카프카의 방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0이라는 숫자가 떠오르는 건, 27년간 그 방에는 사티 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년간 방문자가 0이었던 작은 다락방. 사티는 그 방에서 누구도 본 적 없는 지독하게 높고 뾰족한 성채를 짓고 있었다.


음악가의 방에는 당연히 악기가 있었다. 두 대의 피아노가 있었다. 그 피아노는 벽을 보고 있었고, 심지어 열지 못하도록 묶여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음악가의 방에 있는 노래하지 않는 피아노.' 이보다 더한 미스터리가 없다. 왜 그는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을까?

갤러거가 말했듯 그 피아노가 장식일 리는 없다. 진짜 이유는 에릭 사티만이 알겠지만 추측을 해보기로 한다.

당시 사티의 다락방은 옆 방의 소리가 다 들릴 정도의 열악한 시설이었고,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와 몸을 누인 이웃들에게 폐가 된다는 염려를 했던 것 같다. 실은, 타인에게 폐 끼치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그의 병적인 성격이 한 몫했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의 악기 연주자들에게도 이런 염려가 잠재한다. 자신이 내고 있는 소리가 행여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박수와 환호를 받는 연주라고 해서, 언제나 당당하고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연습 과정은 반복에 또 반복일 테니 충분히 고역으로 다가올 수 있다.(그래서 남편과 따로 살고 있다고 밝힌 모 피아니스트의 아내 인터뷰가 떠오른다.) 에릭 사티의 에피소드는 그 부분을 건드려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마도 타인에게 민폐가 되느냐의 문제는 에릭 사티의 작곡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음악은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가구 음악'으로서의 의미는 이렇게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침묵의 음악은 그렇게 씨앗이 뿌려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열렬한 팬이었던 에릭 사티는 다락방에 틀어박혀서 계속 메모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다. 사티가 특히 좋아했던 포의 단편 <어셔가의 몰락>을 오페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건반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음표가 이어졌다. 그가 할 일은 그 선율을 메모지에 제대로 옮기는 것이었다. 사티가 빠져든 어셔가의 매혹은 '외부와 차단된 채 무너져가는 저택'이었다. 그는 어셔가의 저택에 떠도는 지독하게 단조롭고 폐쇄적인 선율을 그리고 싶었다.


#5. 같은 시각 룸넘버 29. 카프카의 방.

연금술사 골목에 있던 그 작은 방도 소음에 취약하긴 마찬가지였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문 닫는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가 나를 미치게 한다. 이 소리들은 나를 공격하는 생명체 같다. 나는 방 안에서 이 소리를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지만, 소음은 벽을 뚫고 내 영혼을 갉아먹는다.

-1911.11.5 카프카의 일기


생활 소음 사이로 그 방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머뭇거리는 카프카의 발걸음을 닮은 그 소리는 스스슥 펜이 종이에 남기는 흔적의 소리이다. 혹시 자신이 내는 이 소리마저 이웃에게 폐가 될까 봐 숨죽여가며 그는 글을 써 내려간다.


방안은 조용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내 몸속에 피가 흐르는 소리,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대포처럼 크게 들린다. 완벽한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내 안의 유령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끄고 싶다.

-1917. 9월, 카프카의 일기


카프카는 일기장을 덮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작은 한숨이 입김이 되어 창을 통과해 나간다. 눈 내리는 밤하늘의 구름 뒤에 가려진 달빛을 떠올리며 서성인다.


톡톡, 노크였을까. 분명히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에릭 사티는 메모를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장작이 타는 소리였을까, 누군가의 한숨이었을까. 밖을 내다보지만, 창가엔 눈발만 가득 날린다.

그는 다시 바닥에 앉았다. 낮에 입었던 외투의 주머니를 털어낸다. 신문의 부동산 광고부분이 오려져 있다. 이번에는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악보가 아니다. 그림을 그린다. 중세 어느 성의 도면이다. 에릭 사티가 상상한 환상적인 성의 스케치가 그려진다. 이 작은 방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언제나 그렇게 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성을 소유했다. 이렇게 그린 도면들이 어느새 수북이 바닥에 쌓여있다. 그는 이 종이뭉치를 들고일어나 피아노의 윗면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메모지를 쏟아부었다. 피아노의 가느다란 현마다 에릭사티의 성이 걸려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악보들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 새로운 선율을 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말해주는 진실에 귀 기울였다.


카프카의 펜도 다시 움직였다. 그는 종이 위에 거대한 성을 짓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본 적 없는 그 성은 작은 방에서 미로 같은 복도로, 다시 마을로 출구도 없이 이어져있었다. K는 그렇게 그 성의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성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카프카는 다시 펜을 잡았다.


이렇게 생각이 엇갈리는 중에 소년의 마음 속에는 하나의 믿음이 생겨났다. 사실 K가 아직은 비천하고 경멸받는 위치에 있지만, 까마득히 먼 장래에는 틀림없이 모든 사람을 능가하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런 미래가, 그리고 그러한 미래로 나아갈 K의 자랑스러운 부상이 한스의 마음을 유혹한 듯 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소년은 현재 모습의 K도 감수할 수 있었다.

-<성>,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 현재를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감출 수 없는 빛이었다.

작은 방에서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지어진 그들의 세계는 아주 급진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공간에 머물지 않고 계속 뻗어나가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미래파나 초현실주의자들이 파괴하고자 했던 공간보다도 더 앞서나간 것이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카프카와 사티는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침묵 속에 선율을 듣던 사티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가볍게 중얼거렸다.


"정답은 없다. 다만 길(process)이 있을 뿐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카프카의 일기와 기록들, 에릭 사티 평전(오르넬라 볼타의 에릭 사티 문집 등)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