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릴 때
(지난 글에 이어집니다)
미드나잇에 이르자 눈발이 거세어진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들의 성을 뒤흔든다. 뾰족한 첨탑 위로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까마귀가 앉는다. 구슬처럼 까맣고 총총한 눈동자 위로 흰 눈이 부서진다. 까마귀는 날개를 접고 성의 주인처럼 오래도록 밤하늘을 지키고 있다. 그 단단한 어깨가 시간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까마귀는 날아가지도 않고, 여전히 앉아있네, 여전히 앉아있네, 내 방 문 위, 창백한 팔라스의 흉상 위에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 갈까마귀(The Raven), 에드거 앨런 포
13번 방의 낡은 전구가 깜빡거린다. 포의 방은 타버린 재들과 매캐한 내음 그리고 자욱한 연기로 가득 채워졌다. 부숴버린 가구들로 태워진 장작의 불씨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책상은 모두 타버렸다. 검은 숯으로 그려진 벽의 스케치와 문장이 비명처럼 깜빡인다. 블랙 수트를 입은 포의 검은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일렁인다. 불씨가 꺼질 때 그 방의 주인의 한 부분도 모두 타버렸다. 연기 사이로 터벅터벅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렇게 그 성의 시간이 멈추었다.
1826년 12월, 포는 도박 빚을 갚지 못했고 양아버지와의 불화도 극에 달하여 더 이상 학교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버지니아 대학을 자퇴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 방에 유일하게 태우지 않고 남겨진 물건이 있다. 그가 끝까지 난로에 내던지지 못한 것은, 성경이었다. 포는 자신의 불안과 광기를 붙들어줄 닻이 필요했다.
눈 내리는 밤, 성밖으로 난 좁은 길에 발자국이 새겨진다. 그 발자국은 깊은 밤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던 0번 다락방의 주인. 에릭 사티의 뒷모습을 끝까지 쫒은 것은 까마귀의 눈동자였다.
블랙수트들이 드나들던 그 성에 햇빛이 든다. 빛바랜 지붕 아래 열린 창문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마법의 주문처럼 단조롭고 반복적인 피아노 선율이 들린다. 27년간 누구도 찾지 않던 그 방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먼 나라에서 그 방에 도착한 그는 숨을 고른다. 그리고 피아노의 덮개를 열어 현 위에 걸려있는 종이들을 건져 올린다. 그린 것인지 쓴 것인지 쉽게 알 수 없는 그 악보에는 음표보다 지시어가 더 많다.
'매우 반짝이는, 의문을 가지세요. 한 걸음씩, 혀 위에서, 튀어나가지 마세요. 커다란 친절 속에서, 거만하지 않게, 잠시동안 홀로, 공허함을 얻을 수 있도록, 매우 혼란스러운, 이 음을 더 멀리 가지고 가세요, 음을 숨기세요.'
-<사유의 악보>, 최정우
악보들을 넘기던 남자의 시선이 멈춘다. 박자 기호와 세로줄이 없는 단 한 장의 악보 <vexation, 고통>. 그 곡의 지시어는 이렇다. 840회를 반복하여 연주하시오. 찬찬히 악보를 보던 그는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을 들어본다.
주목받지 못하던 그 악보는 대륙을 건넜다. 1963년 뉴욕 포켓 극장에서 한 음악가가 840번의 무시무시한 반복을 무대에 올렸다. 그동안 많은 연주자들이 <벡사시옹>에 도전했으나 극도의 짜증을 내며 나가떨어졌다. 18시간이라는 연주를 견딜 관객도 흔하지는 않았다. 그는 4명의 연주자를 교대로 배치한 끝에 악명 높은 18시간 40분의 연주가 완성되었다. 단 한 명의 관객만이 남아 앙코르를 외쳤다.
에릭 사티의 음악은 그저 잔잔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사티가 의도한 것은 당대 장식주의로 넘쳐나던 바로크나 감정을 듬뿍 담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악보 속에 전복을 꿈꾸던 음악가를 알아본 현대음악가는 침묵으로 일관한 그 곡 '4분 33초'로 충격을 주었던 존 케이지였다.
또 다른 불꽃이 타오른다. 1924년 베를린에서 카프카는 연인과 함께 불을 지피고 있다. <벡사시옹>보다 더 헤아릴 수 없는 반복을 지나온 시간 앞에 서 있다. 일기장과 원고 뭉치들이 불길에 던져진다. 그는 일기나 편지에 여러 차례 낮에는 회사원으로 저녁이면 글 쓰는 삶의 고통을 고백했다. 자신의 글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절망을 태우고 싶었다. 이유도 모른 채 끊임없이 굴을 파는 두더지에 대한 소설 <굴>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마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천수만 번을 몇 날이고 몇 밤이고 돌진하여 이마를 땅에다 짓찧었다. 이마가 깨져 피가 나면 행복했다. 그건 벽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으므로
-<굴>, 프란츠 카프카
몇 만 번이고 반복해서 이마를 찧어 피가 나면 오히려 행복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훗날 폴 오스터는 카프카의 절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엄청난 기대치를 설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살던 방의 시간은 멈추었지만 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제 그 창으로 빛이 들고 새 날의 바람이 들어온다. 첨탑 위의 까마귀는 지금 바다를 날고 있다. 멀리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온다. 영원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