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부터 온 초대장

블러와의 첫 만남 badhead

by 베리티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다. 대학 시절 음악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90년대 얼터너티브락과 모던락을 즐겨 듣던 우리는 공연이나 레코드샵에 같이 가곤 했다. 한 번은 다른 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이 그 친구에게 뭔가를 내밀고 사라졌다.

그건 펄잼(Pearl Jam)의 Vitalogy 앨범 CD였다.


이런 음악 듣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미스터리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거 대시(dash)인 것인가? 그래서 내 친구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


얼마 후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 Ghost World>의 이니드처럼, 시니컬 모드로 내 친구는 말했다.


"그 앨범 노래 중 nothing man이 좋다고 주던데, 난 그보다는 better man이 좋던데"


게임 오버.

후일담은 없었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가 그 친구랑 각자 헤드폰을 끼고 워크맨을 듣고 있을 때였다.


"우리, 음악 바꿔 들을래?"


누가 말했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그날따라 우리는 서로의 워크맨에 있던 앨범을 빼내서 바꾸었다. 내가 듣고 있던 건 오아시스 1집 <definitely maybe>, 그 친구는 블러 3집 <parklife>이었다. 오아시스는 2집이 가장 유명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워크맨에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앨범은 1집이었고, 당시 나는 블러 음악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상황.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브라스로 시작되는 인트로가 무언가를 깨운다.


blur -badhead

https://www.youtube.com/watch?v=YzSnJ8uePyU


블러의 음악은 조금 이상했다. 열창도 아니었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도 아니었고, 남다름을 선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음악은 이래야만 한다는 강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곡에 빠져들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멜로디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었다. 기타 리프 위 얹어진 브라스와 건반의 조화가 우아했다. 음과 음 사이가 단단하고 견고하게 채워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차라리 무심하고 드라이했다.


"난 얘네가 브라스를 잘 써서 좋아" 친구는 그렇게 덧붙였다.


<Parklife의 라이너노트>

결국 레코드숍으로 가서 당장 이 앨범을 손에 넣었다. <Parklife>는 블러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앨범이다. 다양한 장르가 녹아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히트작으로 꼽히고, 이 앨범을 계기로 블러는 브릿팝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badhead는 타이틀곡도 아니고, 더 알려진 곡들이 많지만, 정규앨범을 듣다 보면 종종 발견하게 되는 선물 같은 나만의 곡이다. 공연 리스트에도 들어간다.

(앨범의 라이너노트에는 아날로그 느낌으로 코드가 적혀있다. Badhead 부분에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 1967>의 한 장면이 있다. 노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 영화 안 보신 분들에게는 꼭 추천하고 싶다. 다른 곡들도 악보나 기타 운지법 같은 것들이 낙서처럼 손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호텔 메모지에 쓰인 곡도 있는데 아마도 투어 중에 남긴 흔적이 아닐까. 정규 앨범을 사면 라이너노트를 보는 재미가 있다.)


블러의 배드헤드를 처음 듣던 날에는 알지 못했다. 30년이 넘는 밴드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될 줄은.

인생의 많은 선택이 그렇듯 그 시작은 그랬다. 어디로 나를 데려가 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은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함께 하기로 했다면 다가올 시간, 미지의 영역까지도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는 것.

그러니까 취향을 갖는다는 것 역시 미래로부터 온 초대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덧.

'90년대는 PC통신이나 인터넷 커뮤니티가 시작되어서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누군가 적어놓은 어느 커뮤니티의 글을 메모해 놓았다.



이봐, 어느 가을 늦은 오후에 길을 걷고 있어.

친한 친구도 여자친구도 꼴도 보기 싫은 기분이 드는 그런 메마른 날이지.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있고 너는 무엇이든지 듣고 싶은 기분이야.

하지만 눈물 섞인 목소리로 감정을 질질 흘리는 밴드는 진부하지.

아니, 대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히려 심드렁한 목소리를 따라서 저 모래탑같이 솟은 빌딩 사이를 걷고 싶을 뿐이야.

그냥 모던하게 말이지.

그럴 땐 그냥 블러를 들어.


말하자면, 그런 이유로 블러를 듣는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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