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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 Jan 13. 2019

엄마의 마음

1993년 1월 19일

엄마의 마음

1993년 1월 19일



연희야, 드디어 서울에도 눈이 쌓였단다.

하얗게 변한 서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워 보이더라.

하얀 눈이 세상의 높낮이를 지워버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일이야.

번쩍번쩍한 고층 빌딩도 달동네 판자촌도 잠시나마 같은 모습이 되잖니.

눈을 밟아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 하구나.

너를 두고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이번 눈도 창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겠지?

공해 때문에 서울에서 눈을 밟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단다.

네가 두발로 걸을 수 있을 즈음의 서울엔 눈이 쌓여줄까? 별 생각을 다하지?

넌 모르겠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 줄어드는 우유병 눈금 하나하나에 모두 마음이 쓰인단다.

내가 우리 엄마 마음을 모르고 자란 것과 진배없을 거야.

오늘은 아빠 전화도 없었단다. 뭐 약간 서운하고 기다려지고 그래.


너는 드디어 머리를 옮겨 누웠단다. 기특하기도 하지.

며칠간 엎어놓으면 제 성에 차지 않는지 킹킹대며 머리만 세우고는 악에 받혀 울더니

거뜬하게 돌아눕는 게 아니니?

그리고 점점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나 봐. 

윗집 아주머니와 이야기 나누는 소리에 깊게 잠들지 못하고 칭얼대었단다. 신기해라.

잠깐 은행에 가느라 윗집 아주머니께 너를 맡겨놓았었거든. 

나랑 이야기가 아주 잘 통하는 좋은 분이신데. 아! 이웃이란.

이 집을 내놓고 이사 갈 생각을 하니까 한없이 아쉬운 마음이 드네. 

각박한 서울살이는 통하는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줬어.

타인에게 웃으며 선뜻 문을 열어주기가 이렇게도 고단한 일인 줄 모르고 살았단다.


오늘 네가 잠시 '엄마'비슷한 소리를 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뭐니.

다시 쳐다보았는데 금세 옹알이로 돌아가는 게 아니겠어?

얼른 나를 불러주기를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그랬나 봐.

하루가 다르게 먹는 양도 늘어 분유 100cc를 거뜬하게 해치운단다.

커다랗게 눈을 뜨고는 동글동글 눈동자를 굴리며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쁜 연희야.

'엄마'소리는 늦어도 좋으니 지금처럼만 건강하게 자라 다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즈음, 네 외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었어.

선짓국을 맛깔나게 끓여놓았으니 먹으러 오라고 말이야.

얼마 전부터 먹고 싶어서 해달라고 조르던 거야. 나는 할 줄도 모르고 만들 용기도 나지 않는 음식이지.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지를 만진다는 것을 감히 엄두도 내지를 못하겠더구나.

먹기는 잘하면서 말이야.

친정은 택시 타고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그 새에 잠들은 네가 깨버리면 야단이잖니.

이 엄동설한에 너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는 것은 더 말이 안 되고.

그래도 외할머니는 자꾸 잠깐만 왔다 가라 하시는 거야.

당신 생각엔 딸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이니까 꼭 와서 먹었으면 하셨나 봐.

아무래도 외할머니께는 손녀보다는 당신 딸이 우선 아니겠니. 

네 걱정에 내 발길은 쉬이 떨어지질 않고.

 선짓국 하나에 '엄마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건가' 했단다.

아! 이 순간 네가 또 깨서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선짓국 먹으러 갔으면 큰일이 날 뻔했어.

너를 봐줘야 할 것 같다. 사랑해! 연희야. 선짓국보다 더!




LEN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lotus_hee_illust

메일: choyeonhe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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