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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Feb 03. 2023

글을 쓰는 중입니다.

글을 쓰는 중입니다.

 요즘처럼 자기소개가 어려울 때가 없다. "뭐 하는 분이죠?"라는 질문을 들으면 숨이 탁 막히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 저는 유ㅇㅇ님과 임ㅇㅇ님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결과물입니다.

 - 저는 서울 안 잡대를 중퇴하고 사이버 대학으로 편입하여 졸업한 개 족보를 가졌습니다.

 - 제 첫 사회생활은 스무 살 때 대학로에 있던 피시방이었고, 두 번째는 블라블라….


 질문한 사람은 저런 대답을 원한 건 아닐 거다. 위인전도 읽다 보면 졸음이 몰려오는데 내 일생 행적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질문에는 당연하게도 '지금'이라는 시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몹시 곤란하다. 지금 하는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다음에 몰려올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다. 무슨 국가 기밀이라도 되냐고? 차라리 국가 기밀이면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그러면 그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솔직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동심으로 돌아가 네 살배기 꼬마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곤 한다. 무슨 책을 썼느냐, 판매 부수는 어떻게 되냐, 창작은 고통이지 않으냐 등등. 마치 외계인이라도 된 기분이지만, 나는 엄연히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난 토종 지구인이다.

 다시 배에 힘을 주고 했던 말을 반복해 본다. “글을 쓰는 중입니다. 아직 출간 경험은 없어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문 메이크업 파워 같은 주문 없이도 요술 소녀처럼 변신한다. 네 살배기 꼬마 아이는 어느새 인생 다 산 백 세 노인이 되어 잔소리를 퍼붓는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현실파와 꿈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라는 낭만파로 나뉘어져 보수와 진보처럼 뒤엉켜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다.


 출간 경험만 있으면 이 모든 혼란에 마침표를 찍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연수 작가님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은 나에게 코믹, 멜로, 액션, 판타지 모든 장르를 총망라한 종합 선물 세트였다. 책을 읽는 동안 배꼽 빠지게 웃다가, 배꼽을 쑤셔 넣으며 울곤 했다. 그중 출간 경험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부분이 있었는데 작가님 첫 책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사인회에 관한 양심 고백이었다.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 도서전에서 출판사 마케팅 일환으로 진행한 작가님 첫 사인회는 책 할인판매 내지는 증정 이벤트로 성황리에 끝이 났지만, 정작 그 책을 좋아하거나 작가님 팬은 없었다는 에피소드였다.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아직 글을 쓰는 중일 뿐이기에 출간만 하면 출판사에서 주는 돈으로 내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해 쓰고 싶은 글만 쓰면 된다는 무한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었는데 출간 뒤에는 더 혹독한 어른의 세계가 있던 것이다. 작가님은 캐나다 여성재단이 만들었다는 손바닥을 편 채 엄지손가락을 접은 후 나머지 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을 감싸 주먹을 쥐는 위험을 알리는 수신호처럼 나 같은 사람에게 책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일 따위는 당장 중단하고 어서 빨리 도망가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글을 쓰는 중이다. 돈을 벌고, 경력을 쌓아야 하는 시기에 돈을 쓰고, 경력을 면서 글을 쓰는 중이다. 왜 그렇게까지 글쓰기에 집착하냐고 묻는다면 지금으로서는 그냥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서 어쩔 수 없다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광경이 멋지게 글로 옮겨지지도 않는다. 머릿속 이미지를 글로 변환해 주는 번역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작 머리에서 손으로 이동했을 뿐인데 그 사이에 무슨 조화가 있었는지 종이에 뱉어진 문장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때가 많다.

 이렇게 자랑스럽지 않을뿐더러 실패담으로 도배될 게 분명한 이야기로 브런치 작가에 신청하는 심리는 무엇인지. 새디스트 성향이 있나 보다. 이 글이 어떤 여정을 보여줄지, 어떤 결말로 끝이 날지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뿐이다.


 나는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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