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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Feb 04. 2023

50원짜리 글

글을 쓰는 중입니다.

 드디어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 세계관 한정이지만.

 사실 브런치 작가가 된 건 처음이지만(당연한 소리를!) 낙방 과거는 화려하다.

 첫 거절 때는 모든 게 내 탓이라며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술 먹고 급하게 갈겨쓴 글로 다시 낙방, 그다음에는 음모론을 주장하며 나 말고 딴 놈과 놀아난 게 분명하다고 분노하며 급하게 갈겨쓴 글로 또 낙방…. 이 정도면 궁합이 맞지 않는 거라고 한탄하며 브런치 말고 N군과 사귀겠다고 다짐했건만, 주변에서조차 너에게는 브런치가 필요하다며 다시 시작해 보라고 등을 떠밀더라. 결국 생일 전야 초심으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끝에 우리 사랑은…. (응?!) 역시 ‘초심’과 ‘마지막’ 힘은 위대했다.


 행복한 단꿈에 젖어 뒤적거리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인터넷 바다를 떠돌다가 아뿔싸! 챗 gpt 소식을 접했다. 뉴스진행자는 챗 gpt가 세상을 바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부탁만 하면 원하는 대로 그림도 그려주고, 글도 써주고, 각종 숙제를 해결해주니 요술램프 지니가 따로 없긴 하다. 게다가 지니는 고작 소원 3개만 들어주는데 챗 gpt는 무한정 소원을 들어준다니 지니에게는 역대급 실직 위기이지 싶다.

 그리고 나에게도 브런치와 화해하자마자 또다시 결별 위기가 닥친 셈이다.


 위기감에 밤새 챗 gpt 리뷰를 찾아봤다. 그중 챗 gpt가 자동으로 블로깅 해주는 블로그 제작 과정을 보았는데 감탄이 나오긴 했다. 2분의 시간과 50원 정도 비용을 들이면 3~5천 자 정도 수준급 블로그 글 한 개를 챗 gpt가 써주었다. 나는 고작 2천 자 남짓한 블로그 글 쓰는데 아무리 빨리 써도 3시간은 걸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별로 위기감은 들지 않는다. 챗 gpt는 인터넷의 방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블로그 글을 쓰고,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은 바뀌는 내 지랄 같은 감정을 기반으로 블로그 글을 쓰기 때문이다. 챗 gpt 블로그를 방문하는 분들은 정보가 필요한 분들이고, 내 블로그를 방문하는 분들은 이런 사람도 있는데~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이나 행복감을 충전하거나, 나도 그런데~라고 생각하며 공감을 통한 위로를 받는 분들이다.


 처음 웹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AI가 되어보기로 한 적이 있다. 물론 연산력은 구형 컴퓨터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열심히 웹소설 플랫폼들을 돌아다니며 인기작들 키워드와 구성을 분석했다. 그리고 비슷한 키워드와 구성으로 작품을 써서 마이너 플랫폼에 올리고 반응을 살펴보기도 했다. 결과는 뜨뜻미지근 정도? 흉내 내기만 한 작품은 캐릭터들이 종이 인형 같아진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좋은 스펙에 입을 열 때마다 멋있는 말만 내뱉고, 하는 행동마다 멋져도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하려는 건 사람에 대한 글쓰기이구나, 고로 내가 해야 할 건 사람에 관한 공부겠구나. 이건 플랫폼, 장르 따지지 않고 예술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근래 작가란 '사람을 표현하는 언어에 대한 연구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 빠져 있는 중이다.


 지인이 추천해 준 책 중에 ‘행복만을 보았다.’를 읽었는데 책을 보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책 내용은 보험사 직원이었던 주인공이 회사에서 잘리고, 아내는 바람나서 이혼하게 되자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이런 내용을 보고 웃다니 당장 사이코패스 검사라도 받아봐야 할 거 같지 않은가?

 내가 웃었던 이유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 하는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아주 소심한 사람이다. 쌍둥이 여동생 중 한 명이 돌연사하고, 부모님이 이혼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남매를 끝까지 책임졌고, 나중에 새어머니가 된 분도 남매를 아꼈다. 하지만 주인공은 가족을 책임 진 아버지는 원망하고, 가족을 버린 어머니는 그리워하며, 새어머니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기의 약함을 정당화한다. 무려 책의 3분의 2가 자기가 왜 딸아이 턱을 권총으로 날릴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한 변명인데 이 변명 대부분이 자기 성장 배경에 대한 한탄이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나머지 3분의 1 동안 옆 나라로 가서 새 가정을 이루고, 결말에는 딸의 용서까지 받는다.

 줄거리만 보면 이런 책을 왜 볼까 싶지 않은가? 이 책은 2014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에 후보로까지 올랐던 작품이고,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와 나도 그런데~를 바쁘게 오갔다. 단 한 문장도 빠짐없이 말이다. 책 속 문장을 거닐 때마다 주인공 남자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나이기도 했고, 내가 싫어하던 누구이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던 누구이기도 했다. 그들은 종이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안개가 조금 걷힌 느낌이다. 안개가 걷히며 내 앞에 자리한 까마득하게 높은 산의 윤곽이 보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나는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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