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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Jan 30. 2024

책 유적지로 출근합니다.

서하의 On-Air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쿰쿰한 지하실 곰팡내와 새책에서 나는 잉크의 탄 냄새, 누렇게 숙성된 오래된 책의 종이에서 나는 희미한 표백제 냄새가 뒤섞여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옆동네 서점에 파트타임 알바로 출근한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병행할 수 있는 알바를 꾸준히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자리가 난 겁니다.

 서점으로 간 이유는 첫 번째는 당연히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있지 않은 모아둔 돈을 계속 쓰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굳이 더 돈이 되는 일자리를 찾지 않고 서점으로 간 이유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기획자로 오래 일하면서 데이터 분석은 몸에 밴 습관 같이 되어서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출판 산업에 대한 데이터 자료들은 꾸준히 보아온 터였습니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은 먼저 데뷔한 다른 작가님들은 전업 작가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회사는 관두지 말라는 살벌한 충고를 했습니다.

 얼마 전 조정래 작가님이 신간 황금종이 홍보를 위한 인터뷰에서 후배들을 걱정하며 한 말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등단한 소설 작가가 천 명인데 그중에 전업 작가는 세 명 정도뿐이라고 하더군요.

 데이터 속에서, 종사자들 이야기 속에서 책은 이미 사망선고가 끝나 땅에 묻힌 유적이 된 지 오래입니다.

 대형 출판사 재무제표를 세무사가 분석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시청한 적이 있는데 출판 산업을 화석 산업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 출판사들 몇 년치 재무제표를 따로 구입해서 본 적이 있기에 그 말에 동의하며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숫자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 그들이 아직 책을 읽는 이유를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끝이 '문고'로 끝나는 동네 서점입니다.

 학군지에 있어서 주로 학부모와 학생들 손님이 주 고객으로 문제지, 일반 서적뿐만 아니라 문구류, 반려동물 용품까지 판매합니다.

 마치 다이소에 서점코너가 입점한 느낌입니다.

 이곳의 주 수입원은 문제지입니다.

 그다음 수입원은 문구류이고요.

 소설/비소설 판매량은 같이 일하는 동료분들마다 말이 조금씩 다릅니다.

 한 달에 백 권은 팔린다는 분, 한 달에 오십 권은 팔린다는 분.

 하지만 제가 체감한 건 한 달에 삼십 권 정도입니다.

 동료들이 나이도 젊은데(그곳에서는 제가 막내라인입니다.)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왜 하냐고 궁금해해서 글을 쓴다고 하니 나름 희망을 잃지 않게 하려고 판매량을 부풀려 준 듯합니다.

 문제지는 하루에 백 권 팔리면 적게 팔리는 건데 소설/비소설은 하루 3권 팔리면 정말 잘 팔린 겁니다.

 그나마도 소설/비소설 합쳐서이고 소설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팔린 날이 한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성인들은 주로 자기 계발서나 경제 서적을 선호합니다.

 마음지구력, 히든포텐셜, 마흔 살에 읽는 쇼펜하우어, 부의 법칙, 2024 트렌드 정도 책들이 판매되었습니다.

 가끔 고전 문학이나 시를 찾는 손님들이 있는데 이유는 자녀의 학원 숙제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조지 오웰의 1984,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그런 이유로 판매되었습니다.

 아무도 소설에 눈길 주지 않는 현실에 이곳에서도 답을 찾지 못할까 봐 초조해할 때즈음 문제지를 사러 온 여고생들이 소설코너로 가서 나누는 대화가 들렸습니다.

 (라이트 노벨을 가리키며) 이런 가벼운 소설은 난 좀 별로. 맨날 비슷한 이야기뿐이야.
 (불편한 편의점을 가리키며) 어, 이거 크리스마스 에디션 새로 나왔네. 이거 재밌는데 읽어봤어?
 김초엽 작가 신작도 나왔네?
 정세랑 작가 신작도 있다.

  한참 이런저런 소설과 작가들에 대해 수다를 떨더니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옵니다.

 제가 찾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제 십대 때가 생각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청소년 도서는 교과서 보는 기분이라 보기 싫었고, 어른의 세계가 궁금했기에 일반 소설을 기웃거렸던 그때가 말이죠.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사람은 그대로였습니다.

 문학소녀들도 그대로입니다.

 작년에 구의증명이라는 소설이 역주행으로 이슈가 되었습니다.

 다들 역주행이라는 결과에만 관심을 가지고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알 수가 없어 궁금했습니다.

 답은 10대들의 SNS인 틱톡에 있었습니다.

 구의 증명과 채식주의자를 10대들은 피폐물(주인공이 절망적인 주위 상황에 내몰리며 피폐해져 가는 웹소설 장르)로 부르더군요.

 불편한 편의점, 메리골드마음세탁소 같은 힐링물과 구의 증명, 채식주의자 같은 피폐물(^^;).

 저는 전혀 생김새가 다른 두 장르를 10대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 때문이라고 느꼈습니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장 고귀한 감정.

 그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들이 선택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 세계에서 요즘 책은 굿즈라고 합니다.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소장품이라고요.

 데이터로만 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한정판 에디션으로 표지와 부록 엽서 등을 끼어넣어 판매 부수를 늘리는 마케팅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다른 한쪽에서는 도서 정가제가 문제라고 합니다.

 책값이 너무 비싸서 책을 읽지 않는다고요.

 자유 시장 체제에서 출판사들이 경쟁을 통해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요.

 저는 작가를 꿈꾸기 이전에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두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책은 사람의 마음을 서로 연결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말하면 비웃음 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요즘 사람의 마음을 서로 연결하는 건 돈이라면서 말이죠.

 그러다 보니 어른의 세계에서는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 같은 자기 계발서와 돈 버는 방법을 알려줄 것 같은 경제 서적 위주로 팔리는 것이겠죠.

 사랑이야기나 하는 소설은 쓸모가 없으니 외면받는 것이고요.

 모든 물건은 쓸모에 따라 가격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책을 이런 쓸모로 가격을 정하면 시와 소설, 철학서들은 멸종할 겁니다.

 저는 문학소녀들을 통해서 작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직 사랑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 더 노력해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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