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개천가를 따라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자주 들리는 동네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그곳은 주변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초등학교 건물에 딸린 4층짜리 쥐색 건물입니다.
가끔 초등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열람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곤 합니다.
책상에는 노트나 책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농땡이 피우는 것을 가리기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등 뒤로는 집중한 사람들의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가 책 속에 글자들과 마찰하며 책장을 넘기는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탄내가 희미하게 납니다.
앞에 통창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줄지어 모래밭을 뛰고 있거나, 축구나 발야구, 피구를 하곤 합니다.
변하지 않은 모습에 평온함을 느끼며 한참 성장 중인 생명들의 보드랍고도 촉촉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기운을 느껴봅니다.
햇빛도 대지도 그 누구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순수한 생명체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십니다.
작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어느 날인가 도서관을 나오니 학교 담장에 종이들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그림 전시회를 학교 내부가 아닌 외벽에 전시한 겁니다.
호기심이 동해 갤러리에 방문한 사람처럼 담장을 따라 걸으며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음미하듯 감상했습니다.
한쪽 담장면의 그림을 모두 감상했을 즈음 웃음이 터졌습니다.
어쩜 학교라는 공간은 이리도 변함이 없는지.
그림들은 대부분 시골집, 추석, 가을 풍경 정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에 시골집들은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초가집 몇 채와 감나무, 까치가 화려한 붓터치들을 뽐내며 그려져 있었습니다.
열 살 무렵 그림 숙제를 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에게 대신 그려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고향이 서울인 저는 시골집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의논 상대가 필요했습니다.
가게 일로 매일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빴던 어머니는 초가집에 나무 몇 그루 그리면 되지 않냐고 무심히 말했습니다.
초가집이 뭐냐고 묻자 그것도 모르냐는 짜증스러운 눈빛이 되돌아옵니다.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초가집을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거든요.
학교에서 전시한다고 정성스럽게 그려오라고 했다고 발을 동동 구르자 그제야 어머니 눈빛이 돌변합니다.
그리고 제 손에서 스케치북을 뺏어 들고 화구들을 펼쳐놓더니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저 옆에 멍청히 서서 어머니 손에서 초가집이 지어지고, 감나무가 자라나고, 까치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서 그때 그 어머니 그림을 동네 초등학교 담장에서 본 것입니다.
그것도 한 점이 아닌 여러 점을 말이죠.
어떤 사정일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습니다.
전시회에 사용할 그림이라니 다들 제 어머니같이 아이들 손에서 붓을 빼앗아 들고 열심히 창작열을 불태우셨겠죠.
현실 속 시골집이 초가살이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지났는데 그림 속 시골집은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과 콘크리트 벽을 갖지 못한 모습에 쓴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다 한 그림 앞에서 발길이 멈췄습니다.
선은 삐뚤빼뚤, 형태도 뭉그러지고, 크레파스 짙은 색 위에 옅은 색을 덧발라 지저분하게 도화지에 얼룩진 그림.
위작들 속에서 빛나는 진짜였습니다.
그 그림에는 쥐색 콘크리트 학교를 배경으로 운동장에서 혼자 배틀그라운드 게임을 하는 남학생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핸드폰 옆에 말풍선으로 총싸움을 하는 캐릭터와 점수까지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운동장에 혼자 핸드폰을 든 채 게임하고 있는 모습이 제 눈에는 외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운동장을 친구들과 뛰놀던 공간으로 경험하고 자란 제 생각일 뿐입니다.
키 작은 화가님은 이 작품을 그리며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으로 총싸움하는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웠을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우주시대가 열리고 아이들이 행성학교로 등교하는 모습을요.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행성 고리에 아이들 그림을 전시하는데 그 그림들은 여전히 초가집 옆에 감나무, 그 위에 까치가 그려져 있는 겁니다.
사랑을 핑계 삼아 아이들이 직접 세상을 그려보는 기회를 뺏지 말아 주세요.
성공을 핑계 삼아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을 달리며 친구들과 살 맞대는 시간을 뺏지 말아 주세요.
올해 그림 전시회에는 위작보다는 키 작은 화가님들의 진짜 작품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