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용기를 내고 싶은 날에는 초코파이를
'잘 지내니?'
라는 네 글자에 무참히 무너질 때가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끝끝내 말하지 못하고
보고 싶다고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해주려 애쓰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그대로 두는 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게 최선이라고 믿고 있던 때.
그래 나도 문득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자꾸 맴돌아 혼잣말처럼
우리 밤새 서로 미루다 끝내 하지 못한 말
그대 모르게 연습했었던 말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더 멀어질까 못한 말
지금이라도 전한다면 잊히게 될까
- 밤새 서로 미루다 / 존박, 전미도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담백하고 싶었다.
그게 뒤끝 없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한 때 사회에서 만난 금요일 친구가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 후 금요일에 만나 맛있는 걸 먹거나 맛난 술을 마셨다. 전시회를 보기도 하고 여기저기를 무작정 쏘다니기도 했다.
늘 비슷한 패턴으로 일하는 나와 달리 거대한 조직에서 치열하게 일하던 친구는 만나면 오늘 회사에서 또 한 명이 업무 스트레스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다 같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성실한 대학교 졸업생 배출과 기업의 근로자가 우리나라 재벌가에 기여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둥 심각한 질문을 던지다가,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가 가장 고민인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대화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한강을 걷다가 갑자기 벤치에 앉아서 양말을 벗어보자고 하거나, 강남 한 복판에서 이 노래 좋지 않냐고 이어폰을 나눠 끼 자고 하는 친구의 엉뚱함 때문인지 나도 자꾸만 내 안에 있는 날것들을 꺼내보게 되었다. 기꺼이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은 친구 집에 천체망원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늘 달을 올려다보며 더 크고 자세하게 보고 싶다는 내 마음속 오랜 열망이 그 친구를 만나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친구와 친해져서 꼭 그 소망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길치인 나와 달리 도시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던 친구였다. 어떤 날은 화려한 강남역에서 실컷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교보문고로 가서 책과 음악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태원에서 만난 어떤 날에는 외국인들이 많은 거리 한복판에서 뻔뻔하게 영어로만 대화하기로 약속하고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 문장력을 구사하며 배꼽이 빠지기도 했다.
친구는 초코파이를 좋아했는데 그 아이의 인생이야말로 초코파이 같았다. 초코파이 속 마시멜로가 지구 100바퀴를 돌아도 빠지지 않는다는 내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먹고 싶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사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사람.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마시멜로를 먹은 탓에 그 몸뚱이가 친구라는 게 확실히 증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때 친구에게서 본 것은 자기 생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었다. 내게는 부족했던 그런 점을 채우고 싶어서 나도 친구를 따라 초코파이를 먹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에이스를 더 좋아하면서.
금요일에만 연락하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아무 날이고 새벽 2시, 3시, 4시에도 문자를 보냈다. 단어 한두 개가 내용의 전부였다.
"자냐?" 또는 "나 잠이 안 와."
그러다 어떤 날은 "힘들어 죽겠어." 또는 "나 너무 외로워."
한번 자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나는 당연히 아침에서야 그 문자를 볼 때가 태반이었다. 답장을 해야 한다 해야 한다 하면서도 정신없이 출근해서 당면한 일과를 처리하느라 답장을 자연스럽게 패스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제 더 이상 금요일에 만나기 어렵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아무런 부연설명도 자초지종도 없는 문자에 나 역시 간단하게 답을 보냈다.
"그래, 알겠어."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왜냐고 한번 물어볼 법도 한데, 만나서 얘기하자고도 할 법도 한데.
우리 사이가 겨우 이 정도냐고 화를 낼 법도 한데.
힘들면 힘들다고, 섭섭하다면 섭섭하다고,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실은 진짜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흔하디 흔한 그런 사과가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필요한 때가 있다. 내 마음이 진짜라면 빙빙 돌려 문자 보내지 말고 만나서 술잔이라도 기울여야 한다. 운동하다가 버튼이 잘못 눌러졌다는 핑계로라도 목소리로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말로 하기 어려우면 메일로라도 용기를 내서 전송 버튼을 눌러야 한다.
회사에서 부당하다고 느끼는 순간들, 내 마음이 날카로워져서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고 누군가에게 쏘아붙이고 나서, 혹은 누군가에게 섭섭한 마음에 하루 종일 곱씹고 또 곱씹어보게 되던 그런 날, 누군가가 궁금하고 생각나는 날에는 내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나는 애초에 친구와 맞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친구와의 인연을 정리했었다. 나는 초코파이처럼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라 에이스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다르다며 합리적인 변명을 지어냈다. 하지만 그건 변명일 뿐이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의 변명. 내 진짜 마음을 드러내는 걸 미루고, 관계의 시작도 끝도 상대방에게로 미루는 사람의 변명.
일에서도 감정에서도 솔직하고 뻔뻔하게 밀어붙이고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용기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담대함이 필요한 순간 해야 할 것은 그저 나를 믿고 내 마음을 허락하는 일뿐이다. 남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려면 '너를 위해서' ' 누구를 위해서'라는 그런 변명은 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면 가장 후회하는 건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친구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주었다면 나는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혼자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힘들었을 그 친구에게 한 번이라도 전화를 해주었다면, 늦었지만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고 물어봐주었더라면, 초코파이에 적힌 글자처럼 따스한 말을 한 번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요즘도 초코파이를 보면 가끔 가슴이 아려온다. 무정한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아서. 더 다정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너는 지금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아서.
커피를 마시며 초코파이를 먹을까 에이스를 먹을까 자꾸 망설여진다. 지구 백 바퀴를 돌아도 빠지지 않는 마시멜로를 먹을 용기가 내게 있을까 없을까. 이걸 먹으면 그 시절 그 친구처럼 나도 오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내 삶에 더 자신감을 가져볼 수 있을까.